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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가 루시의 위치를 말해주었을 땐 역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녀석은 분명 몸도 불타고 목도 날아갔는데, 살아 돌아다닌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녀석의 목은 잘 붙어 있냐고 물으니, 신체에 이상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10대 여자애로 보이는 또 다른 파장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나리일 것이다.
루시와 나리가 있는 위치는 어느 재개발 공사중인 지역이었다. 정확히는 무너져가는 어느 빌라였다.
루시는 2층, 나리는 1층에 있다.
“뭔가 이상한데...”
시나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여긴 이상했다.
루시 녀석은 무슨 생각인 걸까? 인질이 아래 있고 지켜야 할 사람이 위에 있다니 넌센스다. 이래서야 데려가려면 데려가라는 거 아닌가.
너무 쉬운 것 같았지만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도 없으므로 간단히 작전을 세웠다.
일단 림피드와 시나는 2층으로 쳐들어가 루시의 행동을 막는다. 그동안 내가 나리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다.
여기 재개발단지를 벗어나면 도로가 나올 것이다. 선희가 거기 대기시켜 놓았을 택시를 타고 안전한 곳에 숨는다.
나중에 일이 끝나고 적의 움직임이 특별히 없다고 생각되면, 림피드가 나에게 연락할 것이다.
그때, 다시 합류하는 것이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림피드는 붉은 눈으로 주위를 노려봤다. 술이 깬 그녀의 모습은 나름 힘 있어 보였다.
“함정은 없어 보이네요. 야생동물을 잡는 덫같이 물리적인 건 모르겠지만, 마법적인 건 없습니다. 발끝에만 조심하세요.”
“투시도 할 줄 아는 거야?”
“투시는 아니고, 마력의 흐름 정도는 조금이나마 볼 수 있거든요. 이래봬도 전 마법소녀니까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녀석! 물론 저번에 뭔가 소환하는 걸 봤으니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생긴 게 소녀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마법소녀라고는 할 수 없다. 너 같이 걸핏하면 술 먹고 퍼지르는 놈이 마법소녀면 세상 어린이들의 꿈이 망가진다.
“선진씨. 뭔가 실례되는 생각하고 있죠?”
“아니 아니. 나도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남자는 30세까지 동정이면 마법을 쓸 수 있대요. 제가 보기에 선진씨는 분명 마법을 쓸 수 있을 거예요. 마법소녀인 제가 보증하죠.”
“맞을래?”
“복수에요. 메롱~.”
그녀는 깔깔깔 웃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저 웬수.
저 녀석, 처음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밝아진 것 같다. ‘현실이 짜증난다.’며 술에서 깨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녀석이 지금은 웃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저기...”
시나가 나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저 림피드하고 친구가 됐어요. 그래서 그래요.”
“그게 아니라... ”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뭔가 일이 잘 못된 거 같아서.”
“뭐가요.”
“제가 당신을 처음 찾아간 이유가 지금은 부서진 나리씨 방의 사진들을 보고서인데... 사진으로 인물을 찾고 주소까지 찾다가... 당신이 얼마 전에 이 동네에 온 것을 알았고... 가정 사정이 복잡했고... 뭔가 달랐는데... 당신과 처음 통성명했을 때도 뭔가 위화감이... 조사할 게 더 있었는데... 애초에 나리씨는 누가 데려간 거고 왜 잡혀간거죠? 루시가 버스에서 시간을 번게 나리씨를 납치하기 위해서였나요?”
“그러니까 결론이 뭐에요?”
“글쎄요?”
그녀는 바보같은 소리를 했다. 느낌이 이상하다는 것으로 나리를 이대로 둘 순 없지않은가.
그때 림피드가 다시 내려와서 뭐하고 있냐며 시나를 끌고갔다.
1층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후우. 이제 긴장도 풀었으니 이제 Work time.
이 빌라는 층마다 2개의 문이 있다. 오른쪽, 왼쪽.
나리와 루시 둘 다 오른쪽에 있다. 루시를 머리 위에 두고 나리를 만나러 가는 거다. 나도 모르게 다시 긴장되었다.
숨을 고르고 문을 열었다.
림피드의 충고대로 주변에 신경 쓰고 걸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안방까지 바로 갈 수 있었다.
나리는 백열등 아래, 거기 의자에 묶여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마치 이대로 부서진 건물 속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했다.
설마 또 죽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난 미쳐버릴 것이다.
나리의 어깨를 흔들어보았다.
“나리야. 나 왔어. 괜찮아?”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물도 못 마셨는지 말라 갈라진 입술이 안쓰러웠다.
“여긴 누구? 난 어디?”
“괜찮은 줄 알겠으니까, 무리해서 농담하지 마. 바보야.”
“헤헤. 와줬을 때를 위해서 준비해놓은 건데, 재미없었나 보네.”
오늘은 그녀의 말에 귀축이나 변태 같은 말이 안 붙었다. 그만큼 기운이 없다는 거겠지.
줄을 나이프로 잘라냈다. 나리가 쓰러지려 하기에 받쳐주었다.
내 등에 업힐 힘도 없어 보인다. 하는 수 없이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해머로 바닥을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청장에 구멍이 뚫리며 무너져내렸다.
떨어지는 콘크리트 덩어리. 나리를 부둥켜안았다.
등을 때리는 돌덩이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게 될 때, 고개를 들었다.
방안 전체가 희뿌연 먼지로 가득 찼다.
그 속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남색 세일러복에 긴 생머리를 가진… 얼마 전에 루시에게 등을 찔려 내 눈앞에서 죽어간 그녀였다.
뒤이어 천장의 구멍에서 림피드와 시나도 뛰어내려왔다.
“빨리 도망쳐요!”
림피드의 외침.
새로운 몸으로 이전한 루시로 추정되는 여자가 내게 팔을 내뻗었다.
저번처럼 피부 밑에서 뭔가 움직였다. 살을 찢고 검은 벌레들이 쏟아져나왔다.
인육을 먹는 작은 포식자들이 하나의 물결이 되어 덮쳐왔다. 동시에 은색 기사가 나타나 막아주었다. 시나가 전력을 다해 달려와 루시를 차 날렸다. 벽을 뚫고 날아간 루시를 림피드와 시나가 따라나갔다.
아니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아직 바닥에 벌레들이 남아 나와 나리의 살을 뜯어 먹으려 사방에 몰려들고 있다. 이걸 처리해주고 가야지!
-절대동결적 시공이해론(絶對凍結的時空異解論)-
시나가 날카롭게 외치는 순간, 숨결이 얼어붙고 공간이 깨져나갔다.
집에는 휑하니 나와 품 안의 나리만이 남았다. 시나가 모두 결계 안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계에는 범위가 있으며 그다지 넓지 않다. 좁은 링에서 루시같은 맹수이자 식인 벌레의 파도인 녀석과 싸움을 계속하면 위험한 건 당연하다.
그녀들도 도망칠 수 있도록 빨리 뛰었다.
약 10분간 나리를 안고 달리니, 폐에서 피 냄새가 올라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걸 본 나리가 미안해했다. 품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아까까지 밧줄에 묶여서 탈진해있던 여자애보고 스스로 걸으라 하고 싶진 않았지만, 한심하게도 체력의 한계였기에 내려놓게 되었다.
우린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피난민처럼 걷고 걸어서 선희와의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도로 앞까지 왔다. 하지만 선희는 택시에 타고 있지 않았다. 그냥 멍하게 서 있었다. 조금 화가 났다.
“택시는 어쨌어?”
“가버렸어.”
이상한 택시다. 그냥 앉아서 기름 값 아끼고 돈 벌 수 있었을 텐데 그냥 가다니 웃긴 일이다. 카 드라이버로서 질주본능을 억제할 수 없었다는 건가? 아님, 꼬마 여자애는 돈 없어 보여서 믿을 수 없었다는 건가?
하는 수 없이, 시나가 준 핸드폰으로 콜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려는 데, 선희가 낚아챘다.
이 애가 오늘 왜 이래?
녀석은 번호를 꾹꾹 누르더니 나에게 돌려줬다.
“전화해봐.”
적혀진 번호는 선희 자기 핸드폰 번호였다.
뭐야. 폰 잃어버린 거야?
일단 통화버튼을 눌렀다. 주변에 벨 소리가 들리나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의외로 통화는 바로 연결되었다.
[도와주세요!]
상대편은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외쳤다.
“여보세요?”
[오빠? 오빠야?]
그건 선희의 목소리였다.
내가 아는 선희는 지금 내 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전화 저편엔 또 선희가 있었다.
[오빠. 미안해….]
선희는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 참고 견디다 터져 나오는듯한 울음이었다. 나로서는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됐다.
[지금까지 오빠를 속여서 미안해.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혼해달라고 해서 미안해. 나랑 같이 있으면 힘들어지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하지만, 다 오빠를 좋아해서 그런 거야. 정말이야. 그리고 지금도... 무지하게 좋아해. 그러니까 날 미워하지 말아줘.]
그녀는 1분 1초가 아깝고 다급하다는 듯이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몸이.. 아파... 흐윽. 목말라. 배고파. 이런 거 싫어... 이렇 거 싫어....]
내가 뭐라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해하고 있는데, 나리가 뒤에서 내 팔을 잡고 꺾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쓰러지려 했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뭐야. 왜 이래?”
땅에 떨어진 휴대폰을 눈앞의 선희가 집어서 내 귀에 대었다.
“오빠. 선영이에게 도망치는 거 그만두고, ‘우리’로 돌아오라고 해. 안 그러면 오빠가 죽는다고 덧붙여서.”
“싫어! 도대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안 해? 그럼 내가 하면 되지.”
그녀는 스스로 전화 너머의 선희에게 협박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날 어느 인적없는 골목으로 끌고 갔다.
어두운 공간.
뿌연 가로등 불빛.
그 아래 잘 아는 놈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붕대를 온몸에 두르고, 괴물의 입이 그려진 마스크를 쓴 철천지원수 녀석이 거기 있었다.
“너 내 여동생하고 친구에게 무슨 짓 했어!”
화를 참지 못하고 보자마자 소리쳤다.
선희와 나리가 날 그냥 배신할 리 없다. 쉽게 찢어질 사이가 아니다. 저 녀석이 약점을 잡고 있거나, 거짓말로 속여서 조종하는 것일 것이다.
난 그녀들을 믿고 있다.
“너. 정체가 뭐야.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건데? 이름이라도 말해보라고.”
“이름?”
“그래 이름. 태어났으면 이름은 있을 거 아냐!”
“이런 이런.”
녀석은 도리질을 치더니 마스크를 벗고, 얼굴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우아. 귀축. 여자는 얼굴과 몸매를 드러내지 않으면, 그게 다 그거란 말이지?”
“그 목소리……. 나리야?”
“정답♪.”
언제나 가려져 있던 그 얼굴은 내 가장 친한 친구 나리의 것이었다.
그녀는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잡고 넘어뜨렸다.
그 위에 자신도 포개졌다.
“사랑해. 그리고 아주 미워해.”
그녀는 내 입술에 깊게 키스했다.
웃으며 선희, 내가 구해냈던 나리도 다가왔다.
골목의 앞쪽, 뒤쪽, 모든 방향에서 수없이 많은 나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틀에서 찍어낸 듯이 똑같이 생긴 수많은 나리들을 보며, 분명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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