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돼지기름 불똥을 튀기며 타고 있는 아귀에게 다가갔다. 몸통에 양손을 박아 넣어 쫙 벌렸다. 잘 익은 살결이 갈라지며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안에는 아귀 인간형 본체가 보였다.
시나는 고깃덩이 안을 헤집고 들어가더니 녀석을 꺼내왔다. 기절해 있지만 죽진 않은 듯하다.
본체가 빠져나간 고기껍질은 프라이팬 위 버터처럼 녹아 무너지더니 증발해버렸다.
"시나씨. 실은 당신, 괴물 중에서도 엄청 센 편이죠?"
내 말에 시나는 살짝 웃으며,
"그렇지도 않아요. 제 주인이 국가와는 싸워도 강한 개인에겐 못 이기듯, 저는 힘과 맷집은 있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습니다. 비영검을 얻어 결계를 만들 수 있게 되지 않았다면 풍기회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거예요."
라고 했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아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정도의 상대를 상처하나 안 입히고 포획하려면 머리도 좋고 엄청난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말 안 듣는 아귀를 데려가서 써먹으려면 몸은 멀쩡한 상태에서 힘의 차이를 알려 굴복시키고 데려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 해도 녀석 또한 강한 괴물인지라 쉽지가 않다.
그 이유로 초반에 약하게(?) 때려서 고기 보호막으로 자신을 둘러싸게 하고, 아파트 던지기나 가스폭발로 내부충격을 주는 공격을 한 것이다.
마치 냇가의 물고기를 잡을 때, 커다란 돌로 물 위로 솟은 돌을 내리찍어서 충격파로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는 것과 비슷하다.
즉, 그녀는 이곳 가스관 위치까지 파악해서 철저한 계획에 따라 사냥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시나는 특별한 표정도 없이 무덤덤하게, 쓰러진 누드 상태의 아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나씨, 이제 어쩌실 거예요? 아귀 엉덩이에 돌을 박아서 마지막 기쁨의 피날레를 장식하실 건가요?"
"무, 무슨 소릴! 전 그런 취미 없다고 분명 말했습니다!"
빨개지는 시나를 보고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하고 웃어넘기려 했다. 화난 시나가 아파트 단지 지상주차장에 박아놓았던 비영검에게 걸어갔다. 그 칼은 바닥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홀로 푸른빛을 뿜으며 공중에 떠있었다.
시나가 손을 내밀자, 빨려 들어가듯 손에 쥐어졌다.
"식 기동 해제."
그 말에 주변이 칼을 꽂았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꿈에서 깬 듯 아파트도 땅도 복구되어 있었다. 멀찍이 저편에 사람도 몇몇 우릴 구경하는 게 보였다.
근데 아귀는 벌거벗은 채 그대로 내 앞에 있고, 거기에 주변 시선이 더해지니 부담이 화산 폭발했다. 내 눈도 괴롭고, 주변이 신경 쓰여 내 잠바를 벗어 덮어버렸다.
시나가 비영검의 칼날 부분을 손에 쥔 채 내게 내밀었다.
"들어봐요."
그녀의 말대로 손잡이를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런 칼을 한번 휘둘러보고 싶었다. 그래서 폼 나게 검무를 펼쳐보려는 데, 무거웠다. 칼끝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낑낑대며 용을 썼다. 그 때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동시에 온몸에 숨구멍이 뚫린 듯, 공기가 뱃속까지 들락날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검이 갈대줄기를 잡은 듯 가벼워졌다.
내 놀란 얼굴을 보고 그녀가 웃는다.
"느낌이 이상하죠? 검을 기동시킬 에너지를 얻고자, 몸의 혈 자리를 강제로 뚫고 외부의 기를 흡수해서 그래요. 원래 이 칼은 죽은 시체에 쥐어서 칼이 주인 없는 신체를 이용해 힘을 얻고 자동적으로 싸우게 만든 거거든요. 그래서 강제적인 면이 있지요. 하지만 놀랄 일은 지금부터입니다."
그게 뭔데? 라고 생각하는 데, 누가 내 옷 소매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을 내려다보니 백발의 소녀가 있었다. 흰 비단 천을 몸에 엉기성기 두르고 있다. 목엔 옥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녀가 반갑게 웃는다. 반투명한 채로.
"안녕하세요. 자의식형 다중 자동화 술식발현기 제 감(坎)호의 운영혼령 비영입니다."
뭐랄까. 유령이닷!
"그 녀석이 문제에요. 이 칼은 '에밀레종'을 만들 때처럼 어린애를 제물로 썼다더군요. 칼에 '자의식'을 가지게 해서, 술식을 하나, 둘 정도밖에 못 쓰는 '회로식' 술식발현기와 달리 여러 술식을 쓸 수 있는 데다, 공부해서 업데이트도 합니다. 덕분에 말도 안 되게 성능이 좋습니다. 인간 정도의 지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대신…."
시나의 말을 경청하는 데, 어느새 내 오른손이 그녀의 가슴을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상당히 부드럽고 풍성한 기쁨이 내 손안에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입에선.
"남자가 만져주니 더 좋지?"
라는 자살신청발언이 튀어나왔다.
뺨이 연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시나가 손바닥을 들어 올린다.
어? 어이! 당신이 때리면 난 아작 난다고!
그런 내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뺨을 후려갈겼다.
15M를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나 죽는다. 어서 구급차를! 이라고 하려는 데, 놀랍게도 몸에 상처 하나 없다는 걸 알았다.
반나체 백발소녀가 내 옆에 서서 말한다.
"좋은 경험은 하고, 다치진 않았고. 고맙죠? 그러니까 아예 그 몸을 제게 맡기지 않을래요? 여생이 즐거워질 거예요."
방긋방긋 영업스마일로 말한다.
그에 대강 상황이 파악되었다. 이런 거였나.
이 칼은 주인을 조종하려 드는 요물이었다. 삶을 다 살지 못하고 죽은 어린애 혼령의 한이 풀풀 풍겨난다.
"에비!"
이런 귀신들린 칼 땅에 떨궈버렸다. 그걸 시나가 주워든다.
"알겠죠, 선진씨? 제가 왜 이 칼을 만지면 헛소리를 하는 지, 그리고 싸울 때 오히려 무기를 던져버리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좋은 무기가 있어도 쓸 수 없는 그녀가 불쌍해졌다.
"하지만, 시나가 변태취미인 건 사실입니다♪ -- 조용히 해!"
시나는 자기 몸으로 자기를 놀리고, 멋대로 소리친 후 칼을 칼집에 넣어버렸다.
그때,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신고했나 보다.
우리는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시나는 기절한 아귀를 싣은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실컷 두들겨 놓았으니 이제 회유작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회유에 실패해 녀석이 날뛸 수 있으니 인적 없는 곳에서 작전은 행해질 것이다.) 시나가 말하길 ‘채찍과 당근’이라 했다. 평범하고 적절하기 그지없는 비유인데 왜 그녀가 말하면 SM틱하게 들릴까. 그리고 아귀의 뒷구멍은 왜 걱정되는 것일까.
회유...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신경 쓰이는 일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시나의 지시대로 혼자 택시를 타고서 호텔로 돌아왔다. 내 평생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최고급 호텔의 로비를 지나, 금색으로 삐까뻔쩍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스위트룸이 있는 최상층 버튼을 눌렀다.
주변 사람들 모두 날 수상하다는 눈으로 봤지만 굳이 신경 쓰진 않았다.
최상층에 도착하여 림피드에게서 받은 호텔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벨은 누르지 않았다. 아직 초저녁이라 림피드가 자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거실을 걸었다. 근데 저 안쪽 침실근처에서 쿵쾅쿵쾅 코뿔소가 돌진해오는 듯한 발소리가 울렸다.
“늦어, 늦어, 늦어!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능야!”
림피드는 고속으로 달려오더니 그대로 내 배에 헤딩했다. 인간 규격 외의 존재가 먹인 헤드 바디블로는 보기보다 강력한 것이어서 숨이 막혀왔다.
아픔을 참으며 호흡을 고르려는데 림피드가 내 손을 잡더니 억지로 자기 침실 쪽으로 끌고갔다.
림피드에게 손을 잡혔을 때, 생각보다 더 그녀의 손이 따뜻하고 보드라워서 놀랐다. 고양이 발바닥처럼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뭐. 그것도 다 술에 숙성되어서 말랑말랑해진 것이겠지만.
억지로 끌려들어간 림피드의 침실은 역시나 주지육림의 미니어쳐 버전이랄까, 아수라장이랄까, 쓰레기장이랄까, 지옥의 일부를 떼 온 듯한 개판이랄까, 분명 어제 저녁에 호텔직원이 다 청소했을 텐데, 이곳의 지저분함은 10년은 청소 안 한 듯한 관록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것이다.
자기방 청소를 죽어도 안 하는 어린애가 10세기에 걸쳐 어지르는 데만 자신을 특화시키고 수련해와야지만 이 정도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이룬 자가 내 곁에 있었다.
방을 자세히 둘러보면 흐트러져 있는 건 술병과 안주뿐만이 아니다. 이 방에는 온갖 게임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게 다 흐트러져 있었다. 레고, 보드게임, PC, 플스, XBOX, Wii, 노래방 기계까지 없는 게 없다.
그리고 거기엔 공통점이 있었다. 전부 1인용 게임이라는 것이다. PC는 잘 모르겠지만, 노래방 기계까지도 마이크가 1개뿐이었다.
평소에 그녀는 혼자서만 노는 걸까?뱀파이어는 밤에만 활동할 수 있고, 남의 집에는 초대받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는 제약이 있다. 그래서 바깥 활동 대부분이 시나에게 일임되어 있었다. (오늘만해도 그렇다.) 즉, 시나는 귀차니스트인 주제에 무지 바빠서 주로 밖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림피드는 혼자일 때가 많고, 심심하고, 결국 나같이 놀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같다.
림피드는 방 한가운데 놓인 관 앞에 날 앉히고 잔에 술을 따른 뒤 내밀었다.
“오해하지 말라능야. 난 애가 아니니까, 조금 혼자 있었다고 외로워하거나 하지않는다능야. 단지, 오늘 좋은 술을 구했으니까 조금 맛 보여줘도 좋지않을까능야싶어서... 음. 그런 거라능야.”
“아 고마워. 근데 나 미성년이라서 술 마시면 안 돼.”
그 말을 들은 림피드는 막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성의가 있지, 입도 안 대기냐능야. 많은 거 바라지 않으니까. 같이 술 먹고 이야기정도는 해줘도 좋지않냐능야요!”
“아아. 알겠으니까 삐지지 말라능야.”
“난 애 아니니까 이런 걸로 안 삐진다능야. 그리고 말투 따라하지 말라능야.”
“우앙. 우앙. 알았다능야.”
자꾸 따라하니 그녀는 명백하게 삐진 얼굴로 고개를 획 돌렸다. 재미있는 녀석.
그보다 문제는 술이다. 사실 난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동으로 결벽증같은 게 있어서 몸과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들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다른 때 같으면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모로 도와주는 림피드가 권하고 있으니 마시는 척만이라도 하기로 했다.
내가 술을 찔끔찔끔 마시는 걸 곁눈으로 본 림피드는 무지무지 기뻐하는 얼굴로 같이 마셔대기 시작했다.
“림피드, 널 보면 참 신기한 기분이 들어.” “왜? 너무 예뻐서능야?”
실제로 예쁘기는 하지만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면 반발하고 싶어진다.
“너 거울은 보고 사냐? 아. 뱀파이어니까 자기 얼굴이 안 비치던가?”
“뱀파이어도 거울에 비친다능야. 그 소문은 보통 뱀파이어 저택의 거울은 주인이 비치지않게 제작되어있거나 가짜 거울이 많아서 생긴 거라능야. 왜 그렇게 하냐면 거울에는 뱀파이어의 진짜 모습이 비쳐버리거든.”
“진짜 모습?”
“뱀파이어는 먹고 살아야하니까 거미줄처럼 인간을 매혹시키는 기술이 있다능야. 이거 아냐능야? 곤충의 눈에 꽃은 자외선으로 특이하게 빛나보이고, 거미줄도 꽃처럼 빛나서 먹이를 유혹한다는 거. 흔히 사람들은 거미줄이 눈에 안 보여서 곤충이 걸린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라능야. 그렇게 태평스럽게 사냥해서 세상에서 살아남겠냐능야.
하여간 뱀파이어도 스스로를 마법적 분위기로 포장하는데, 거울로 보면 그게 사라져서 못 생겨보이게 된다능야. 그래서 뱀파이어 집엔 거울이 없거나 이상한 거울이라능야. 뭐, 버려진 엘리멘터리가 자기 보존을 위해 에너지드레인 행위를 하고 다니게되면, 뱀파이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건 거울에 안 비치는 게 맞지만, 나랑은 좀 다른 거라능야.“
“새로운 걸 또 하나 알았네.”
진짜 모습이라. 이 녀석 거울에 비친 모습 한 번도 못 봤던가?
잘 생각해보니 본적 있었다. 찜질방에서. 하지만 그냥 평범하게 똑같이 비춰졌기에 잊고 있었다. 뭐야. 진짜 모습이고 뭐고 다를 게 없잖아. 재미없는 녀석.
“뭐. 근데 선진오빠한테는 소용없나보능야? 그게 좋아. 오빠는 그래서 편해. 매혹에 홀리지도 않았는데, 내가 뱀파이어인 걸 알아도 맘 놓고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얼빠지고 생존본능 없는 사람은 의외로 흔치않았다능야. 그나마도 모두 위원회 사람이어서 멀리서 살고 있고, 그래서 모처럼의 기회에 이야기도 하고 놀고 싶다능야.”
이 녀석 묘하게 날 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칭찬하는 것처럼도 들려서 화내야하는지 헷갈렸다.
“뭔가, 너 말하는 게 평생 솔로였던 노처녀가 선보러 나와서 하는 말 같아. 잘 대해줘서 당신이 편해요. 이런 거. 그러고보니 너 결혼한 적 없지?”
“없는 데 그게 어쨌다능야? 불만이냐능야?”
“훗. 노처녀.”
“난 노처녀 아니라능야!”
술 좋아하고 방이 더럽지만 돈은 많다. 나이도 많다. 따져보면 이 녀석은 노처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아, 동안(童顔)에 속았다!
“야. 노처녀야. 근데 내 동생은 어디가고 너 혼자 있는 거야? 호텔엔 결계가 있으니 안전한 거 맞지?”
“...노처녀란 말. 계속 들으니 가슴이 저려온다능야. 부탁이니 그만 둬달라능야. 이건 농담이 아니라능야. ...여동생씨는 내 관에 식당 다녀온다고 포스트잇 붙여놓고 갔으니 곧 올거라능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선희가 ‘다녀왔습니다’ 라고 했다. 곧바로 이 침실로 와 문을 열었다.
“어? 림이가 일어나 있네. 한번 관에 같이 들어가서 자보고 싶었는데.”
“그거라면 얼마든지 좋다능야. 이리 오시라능야.”
림피드는 술병을 치운 뒤, 관뚜껑을 열고 선희를 데려다 집어넣었다.
“아. 따뜻해 어째서지?”
“겨울이니까 황토전기매트 깔아뒀다능야.”
“림이 머리 좋네. 최고야. 그러니까 나 좀 더 여기 있을래. 더 따듯하게 뚜껑도 닫아줘.”
그리하여 관 속에 여동생, 그 위에 술잔을 두고 림피드와 나.
3인 토크가 시작되었다.
[근데 오빠. 일은 잘 되었어? 만나러 간 사람이 도와준대?]
“아귀 말이야? 일단 시나씨가 데려갔는데, 어떻게 될지는 확실히 몰라. 그래도 잘 될 거 같아보이더라.”
[응. 내가 여기서 게임도 하고, 호화로운 호텔식당에서 양갈비를 음미하는 동안 수고했어. 림이가 주었던 식비 조금 남았으니까 그걸로 컵라면이라도 사먹어.]
내가 화가 나서 관을 두들기자, 선희는 ‘농담이야.’라며 사과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실 그 자체였기에 배 아픈 건 가라앉지 않았다.
“선진 오빠야. 근데 ‘아귀’는 그 애 언데드타입이지 이름이 아니라능야.”
“이름? 그런 것도 있어?”
“당연하다능야. 태어날 때 이름이 아니라 통칭인 경우가 많지만 다 이름은 있다능야. 그 애 이름은 ‘그랜드 베이컨’이라능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또 한잔 마셨다.
아귀 녀석. 그렇게 술안주같은 이름이었냐?
그 이름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위대한 삼겹살’이란 뜻이 될 것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분명 위대할 만큼의 삼겹살이 붙어있었다. 살들의 아름다운 굴곡이 무려 그랜드 캐넌에 버금갔다.
뭐. 웃긴 이름이지만, 어찌보면 멋진 외국 아저씨 같은 이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 위인 중에 분명 베이컨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근데 아까 전부터 이야기가 자꾸 먹는 쪽으로 가네? 배고파진다. 딴 얘기하자 좀 건설적이고 꿈이 있는 걸로. 그래 꿈. 림피드야. 너 직업이 경찰 같은 거랬지? 어때, 할 만해? 좋아?”
“별로 직업으로 좋은 건 아닌데, 내가 해야만 하니까 하능거라능야.”
“뭐야. 영웅적 사명감이야? 안 어울리게시리. 술만 마셔대는 주제에.”
“일이 술을 부른다능야. 나를 술 퍼게 해. 맨날 사람이 죽고, 저주하고, 증오하고, 광기에 잡아먹혀 날뛰는 걸 보니까 나도 미칠 것 같다능야. 진짜로... 그걸 치료해주고 싶어서 일을 시작했는데, 이제 모르겠다능야. 아무리 노력해도 끝이 없으니까. 무력함만 느껴지고... 어느새 술만 먹게 되었다능야. 죽갔다능야.”
그녀는 한숨을 쉬며 술을 또 입안에 털어넣었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그녀와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성격을 보고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지 궁금했었다. 그녀는 강한 척 하지만 순하고 유약하다. 정이 많다. 외로움쟁이며 사람을 좋아하고 금방 마음을 열고 달라붙는다. 인간의 악한 행동들을 보아왔으면서도, 기본적 믿음을 버리지않고 있다.
거부당하면 뭘로 마음을 보호하려고.
배신당하면 어떻게 마음을 추스르려고.
마음을 준 사람을 잃게 되면 그걸 언제 되찾을 줄 알고 그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터에 방탄복과 총 대신 산타복장을 하고 사탕꾸러미를 들고 가려하는 이 녀석을 어떻게 판단하면 좋을까.
불쌍한 아이가 많다고 전쟁터로 달려간 저 멍청한 산타를 보라.
그녀는 결국 매일 잠에서 깨어나면 누군가의 피바다위에 서고, 악의 담긴 칼날에 찢기고, 스스로 살기위해 상대를 잡아먹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차라리 전쟁터 말고 사람을 좋아해도 되는 곳에서 산타를 하든가.
차라리 적 죽이기를 좋아하는 잔인한 괴물이 되든가.
술에 찌들어 스스로를 부수면서 뭐하자는 짓인가.
바보야. 선물을 주는 산타가 피투성이면 받는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고맙다고 하지 못하게 되잖아.
나는 그녀 옆으로 가서 끌어안아주었다.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기분은 전해지길 소원했다.
그 때, 림피드 핸드폰이 울렸다. 시나로부터였다. 잠시 동안의 통화 후 림피드가 내용을 말해주었다.
아귀가 협조하기로 했다고 한다.(베이컨이란 이름은 너무 웃겨서 안 쓰기로 했다.)
림피드의 설명에 의하면, 아귀는 멀리까지 있는 동물의 ‘고기의 질감’, 즉, 육체의 파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루시는 항상 특이한 파동을 가진다. 그래서 그가 이 도시에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 운 좋게도 아귀는 루시의 위치를 이미 파악해두고 있었다. 루시는 함부로 강한 언데드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지역 내 힘의 밸런스, 생태계가 변해버린다. 그래서 언제나 그를 주시해온 것이다.
잠시 뒤 시나가 오면, 바로 나리를 구출하러 가기로 했다.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희도 따뜻한 관속에서 뭉그적뭉그적 기어나왔다.
그 때, 림피드가 우리 남매의 이름을 불렀다. 뭐지?
“저, 저기 말이능야.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말한다능야. 난 너희들이 좋다능야. 친해지고 싶고,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능야. 그러니까, 저기... 내 친구가 되어줄라능야?”
녀석은 새삼스럽게 술로 빨개진 볼을 더욱 붉히며 말했다. 대답이 필요하려나?
나는 멋있게 보이려고 답없이 선희에게 찡긋 윙크했다. 그녀도 똑같이 윙크했다.
이걸로 모두 친구다. 라고 하려 했는데... 내 윙크를 무슨 뜻으로 알아먹은 건지 선희가 달려가 림피드의 치마를 들쳤다.
결국 한 대씩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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