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진정된 건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넉다운 된 선희와 더 놀고 싶다는 표정의 나리. 그리고 죽어가는 나.
환자가 이 모양인데 간호사는 어디 있는 거야?
"-----!!!"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럽다 싶었다. 병실 문이 덜컹 열렸다.
누군가 쳐들어왔다. 간호사 한 명이 막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떠밀려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그들은 곧장 나에게 다가와서 멱살을 잡았다. 부모들이었다.
“너 왜 또 선영이랑 같이 있는 거냐! 또 죽이려고?”
“엄마. 아빠. 그만 해요!”
선희가 일어나 그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들은 무시했다.
안 되겠다 싶어진 선희는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얘야. 괜찮니?”
그들은 놀라서 그녀를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나가면서 선희가 뒤돌아보며 깜찍하게 윙크했다. 가짜니까 걱정하지 말란 세심한 배려였다.
결국, 이곳엔 나리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저기…. 그 사람들이 지금의 부모님들?”
“뭐…. 그렇지.”
“부모 같지 않은데…. 저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뉴스에서 들어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정말 너무한 거 같아. 선진아. 차라리 우리 집 올래? 저런 집에서 사는 것보단 나을 거야.”
사실 거기서 사는 게 힘들어서 아지트를 마련하긴 했다.
하지만 어느 미친 녀석에게 침범당해서 돌아갈 수 없는 상태다.
어제 일로 한층 더 괴롭힘이 심해진 이때, 다른 곳에서 머물 수 있게 해준다면 굉장히 고마운 일이다.
그래도 나리네에, 여자애 집에 간다는 건 좀 맘에 걸렸다.
“말은 고맙지만, 너무 폐가 되는 거 같아. 네가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는 없잖아.”
“이유라면 있어.”
“있다고?”
“응. 그러니까 말야. 음….”
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시선이 흔들린다.
손가락을 꼼지락댄다.
“바보. 그런 거 입으로 말할 수 있겠어? 하여간 그런 거니까, 그런 건 줄 알아.”
“뭐야. 뭔 소린지 모르겠어.”
“우이그!”
나리는 화내면서 난데없이 내 이마를 때렸다. 찌릿찌릿한 게 분명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어젯밤, 집에 초대해서 말하려고 기합 넣고 있다가 그냥 간다고 해서 기운 빠지고, 오늘 계획 잡고 말하려고 기합 넣고 있다가 병원에 있다고 해서 기운 빠져가지고, 더 이상 말할 기합이 없단 말이야. 힌트는 줄 테니, 뇌가 있으면 알아서 생각해. 바보야!”
그녀가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얼굴에 맞추어 고개를 내렸다. 평소에 남몰래 좋아했던 그녀가 가까워지고 있다.
머리카락이 아래로 흐느러지자, 오른손으로 쓸어올렸다.
어렴풋이 샴푸향기가 났다. 내 심장이 강하게 뛰는 걸 느낀다.
입술은 내 이마에 닿았다. 둔감한 그곳에서 부드럽고 약간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근데 이마라니 약간 맥이 빠졌고,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곧 내 코끝에 또 입을 맞추었다. 이마보다 약간 더 민감한 부분, 더 증폭된 감각에 놀랐다. 게다가 아래로 내려왔다는 건 어떤 행선지를 나타내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것이 입술.
결국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인체의 가장 민감한 부분끼리 맞닿아 서로의 감촉을 이야기한다. 그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해버리려 했을 때 병실 문이 열렸다.
“휴우. 엄마, 아빠는 도대체 왜 저럴까. 겨우 따돌렸네. 오빠야. 나 왔...”
선희였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충격에 몸을 떤다. 곧 뭔가 억누르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오빠. 나 먼저 집에 갈게.”
“선희야!”
그녀는 병실에서 뛰쳐나갔다. 나도 뒤따라가기 위해 목발을 집었다. 그때 나리가 내 손을 잡았다.
애절한 눈빛.
지금 떠나지 말아 달라는 눈빛이었다.
“미안, 나리야. 하지만, 지금은 가서 달래주어야 할 거 같아.”
그녀는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응. 저 애. 왠지 몰라도 충격 받은 거 같으니까. 근데 왜 그 애를 자꾸 선희라고 부르는 거야?”
“그건….”
원래 나랑 살 때는 선희라는 이름이었다가, 이혼하고 새 가정 차린 아버지네로 옮겨져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이야기... 솔직히 집안의 부끄러운 일이라 말하기 꺼려졌다. 그래서 나와 선희만 있을 때는 선희라고 부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보통 아는 선영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냥 선희라고 해버릴 때도 많지만.)
“선진아. 그 애 이름은 선영이지, 선희가 아니야. 꼭 알아둬.”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아주었다.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난 선희를 쫓아 병실을 나갔다.
먼저 지하주차장으로 가보았다. 이미 부모들과 차를 타고 떠났거나 떠나는 중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는 있었고,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합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환자가족들이나 대기 중인 환자가 모이는 그곳으로 가보았다.
하지만, 아는 얼굴은 없었다.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들어가던 순간, 나오던 아버지와 마주쳤다.
“너, 잘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날 끌고 지하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태웠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입원하지 못하게 집에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선영이 입원은 잘 시켰어? 어. 빨리 와. 지금 가야 해.”
그는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한번 물어나보죠. 왜 저만 그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그는 한숨을 쉬며 뒤돌아보았다.
“너, 아직도 모르겠냐?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거였군.”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다. 난 지금 새로운 가정을 꾸려서 잘살고 있었단 말이다. 옛 부인, 그러니까 네 엄마와의 관계도 다 정리돼서 안정을 찾아가는 데, 네가 와버렸어. 덕분에 지금 집안 분위기가 얼마나 껄끄러운지 알아? 넌 지우고 싶은 과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알아서 집을 나가라고 열심히 눈치 준거다. 그래서 나간 건 좋은데 선영이까지 데려가다니. 아. 진짜 쓸모없다니까.”
“그럼 왜... 날 데려온 거야. 옛집에서 그냥 혼자 살게 두지.”
“법도 문제고 세상의 눈이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 역시 태어났을 때 바로 죽이지 않은 게 한이 되는 군.”
그때, 새엄마가 와서 조수석에 탔다.
“어라. 있네.”
“방금 잡아왔어. 그보다 의사가 뭐래?”
“저체온이 계속 되는 건, 역시 뭔가 이상하니까 정밀 검사해보겠다네요? 내일 데리러오라네요.”
차가 출발한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빙글빙글 나선형 길을 오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법? 세상의 눈? 이미 그런 거 신경 쓰고 있지 않지 않은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법이 금지한 아동학대다.
아니,
아니다.
난 아동 따위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힘없는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았다. 무력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어제의 비참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도록 힘을 갖추겠다. 선희가 다치는 일 없도록 힘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겠다.
“좋아. 원하는 대로 혼자 집을 나가주지. 차 멈춰.”
“지금 하지 말고, 나중에 몰래 나가라. 그래야 우리도 할 말 있을 거 아니냐.”
“멈추라고!"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전석의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려버렸다. 펀치를 맞은 그는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간 듯하다. 엑셀을 밟아 차가 돌진한다. 앞의 벽에 부딪혔다.
“아야야.”
세게 부딪친 건 아니기 때문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찌그러진 차의 앞부분이 용광로에라도 담갔다 꺼낸 듯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 엔진 덮개의 틈새에선 불길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픽픽 소리가 날 때마다 덮개가 안에서 뭔가 맞은 듯 부풀어 올랐다.
위험함을 느낀 나와 부모들은 차 문을 열고 도망치려 했다.
차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일순 인간의 형상을 닮는가 싶은 순간, 시야가 태양을 닮은 주황빛에 휩싸이며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
그리고 깨어나 보니 다시 병실 침대 위였고, 사방이 중환자실 질식 사고등으로 난리였으며, 급히 병원에서 나오자 림피드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림피드와 시나씨도 아는 이야기.
나는 나와 선희가 죽었었다는 사실은 빼고 그 외의 사실은 모두 말했다. (우리에게 이상한 점이 있으면 그걸 먼저 조사하려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리가 걱정되었다. 그녀를 찾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였다. 힘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아직 힘이 없으니까 힘 있는 자의 힘을 빌려야한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도움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로 인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거짓 없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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