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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살인마를 만난 밤. 선희와 내가 살던 옥탑방.
“안녕, 선영이와 좀 놀고 있는 중이야.”
갑주 같은 파카를 입고, 온 몸에 붕대를 감고, 괴물의 입 마스크를 쓴 사이코 녀석은, 흰 밀납 인형처럼 된 여동생을 손에 들고 인사했다. 그러며 숨통을 조르고 있던 손을 놓았다. 선희가 실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강하게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죽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놈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주먹이 닿기 전에 팔을 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어서 녀석이 내 뒷목을 잡고 들어 올려 벽에 밀어붙였다. 팔을 꺾어 어깨 위까지 올렸다. 관절에서 기분 나쁜 뼛소리가 들렸다. 뼈마디 속의 신경도 잡아당겨져서 찢어질 것 같이 아팠다.
그 상태에서 내 허리의 벨트를 뽑아 팔을 묶었다.
옴짝달싹 못 하는 걸 확인한 녀석은 날 짐짝처럼 방구석에 집어던졌다.
그 다음엔 옆에 누워 있던 선희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축 늘어져 있어 마치 버려진 고양이 시체 같았다.
다시 한 번 봐도 확실히 죽어 있다. 살아있을 땐 핑크빛이 감돌던 뺨이 이제는 푸르스름해 보인다.
붕대 녀석은 그런 선희의 턱을 잡고 입을 벌리게 했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입에 넣었다. 목을 눌러 삼키게 하려 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반사적으로 삼키지 않는다.
“루시가 이걸 왜 같이 줬나 했더니만.”
녀석은 파카의 주머니에서 캔 커피를 꺼냈다. 따서 마스크를 벗고 자신의 입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선희와 입을 맞춘다. 혀로 먼저 넣었던 ‘뭔가’를 목구멍에 맞추고, 액체로 밀어 넣었다.
“그만둬!!”
놈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녀석은 선희를 죽인데다, 그 죽은 몸까지 더럽혔다.
내가… 만약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반드시 복수하겠다. 뼈 한 조각 성하게 남겨두지 않겠다!
“이제 시간이 될 때까지 나랑 좀 있어야겠어.”
붕대 녀석은 나의 머리카락 뭉치를 잡고 끌어당겼다. 다른 손엔 선희를 들고 있다. 덩치도 작은 데 인간의 것이라 믿기 어려운 근력이었다.
녀석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앞을 본 순간 멈췄다.
문 앞에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퇴마사 복장. 동양화의 선녀 같은 얼굴을 한 그녀의 등에는 커다란 대검이 매어져 있었다. 얼어붙을 듯 한 푸른 눈이 웃는다.
분명 선녀 같은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의 옥상, 밑에서 올라오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귀신처럼도 보였다.
붕대를 한 괴한과 그녀는 서로에게 말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괴한이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려한다. 하지만 여자 쪽이 더 빨랐다. 그녀의 주먹이 거짓말 같은 속도로 괴한의 머리에 닿는 순간.... 터진 눈알이 바닥으로 튕겨나가고, 붉고 뜨거운 액체가.... 나에게....
정신이 들고 주변을 보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는 그 공간에서, 여동생의 시체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그녀도 나도 피에 흠뻑 젖어있었다.
일어나 어디론가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이 사라져버리니 마냥 허탈했다.
아니, 허탈하단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냥 정신이 나가 있었다.
조금 정신이 든 건 부모가 있는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가출해서 나온 집이지만 분명 부모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 아무리 그런 부모라도 집에 있던 자식이 죽었다는 걸 알려주어야겠지.
대문 앞에서 확인차 여동생의 가슴에 귀를 대어봤다.
무음.
심장 고동소리 따위 들리지 않는다. 애초에 체온이 식어 있다.
“으으윽.”
끓어오르는 오열을 억누르며 그녀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차갑지만 아직은 부드러웠다.
미안해.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집이 너무 허술했다. 그런 곳에 어린 여자애 혼자 남겨두면 안 되었다. 모두 내가 바보 같고, 가진 게 없고, 약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선희야. 대신 한은 풀어줄게. 녀석을 가장 처참하게 죽어주겠어.
이를 악물고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르는 손끝에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세요?]
“저예요. 그리고 선희... 아니, 선영이도요.”
곧 현관문이 열리고 부모들이 나왔다. 금슬도 좋으시지. 언제나 쌍쌍으로 다닌다. 하긴, 그 정도로 사이가 좋아 주지 않으면, 죽어버린 원래 나와 선희의 엄마에게 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애초에 아버지가 바람만 안 피웠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더욱 미워졌다.
그들은 피투성이인 우리들을 보고 ‘히익’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이제 선희가 죽었다는 걸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직 생각 중인데 아버지가 내 품에서 그녀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주, 죽었잖아.”
“뭐라고요?”
새엄마가 선희의 파리한 뺨을 만져본다. 곧 그녀의 뺨도 파래져 갔다. 곧 휴대폰으로 급히 구급차를 불렀다.
“너. 너. 어떻게 된 것인지 들어와서 똑바로 설명해!”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혀 집안으로 끌려갔다.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건 분명한 의무라고 생각해서 가능한 한 자세히 말해주려했다.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골프채로 날 팼다.
전부터 계속 된 학대의 계속, 아니 이번엔 이유가 있다. 내가 그녀를 죽게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모든 면에서 비참했다.
“콜록, 콜록.”
그때 마룻바닥에 놓아두었던 선희의 시체가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죽은 사람도 척추반사 같은 게 한동안 살아있어서 발작적으로 움직인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그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잠에서 깨듯 몸을 일으켰다.
“어라? 꿈이었나?”
선희는 그런 얼빠진 소리를 했다. 표정도 진짜 늦잠자다 일어난 듯 흐리멍덩했다.
“이건 웬 피야. 으와와와.”
이번엔 자기 옷에 범벅된 피를 보고 허둥댔다.
그걸 부모들이 달려가 껴안았다.
“엄마. 아빠. 왜 그래? 게다가 오빠도 다쳤잖아! 구급차! 구급차!”
그때 불렀던 앰뷸런스가 도착했고, 나와 선희를 응급실에 데려갔다. 선희는 출혈로 인한 체온 저하 외에 어떤 문제도 발견되지 않아 관찰보호하기로 했다. 나만 입원하게 되었다.
그날은 밤을 새웠다.
잠시 선잠이 들기도 했지만 그나마 곧 깨버렸다. 괴한 때문에 온몸이 부서져 있는 꼴이니 아프기 때문이기도 했다. 갈비뼈, 팔뼈가 부서지고 온몸이 멍투성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마음이 진정이 안 되어서였다.
병실 안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서 침대 주변에 블라인드도 쳐 있는 것 같다. 환경 자체는 잠자기에 좋은 환경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수면의 세계에 빠지도록 노력했다.
겨우 잠드는가 싶었더니만 다시 깼다. 내 오른팔을 죽부인처럼 껴안고 있던 여동생이 고개를 드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언제 여기 숨어들어왔다지?
선희는 내가 잠들었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 내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서 목덜미에 입김을 불어서 간질였다. 반응하지 않자 ‘앗싸’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평소의 나라면 뭐 하는 짓이냐며 벌떡 일어나 그녀를 날려버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었다.
“잠든 것 같아요. 공돌이님.”
“쿠하하. 좋다. 해치워버렸!”
그녀가 숨죽여 속삭였다. 아마 또 손에 끼워 조종하는 핸드 퍼핏인가 하는 인형들로 혼자 인형극을 하나보다.
“그…. 그럼 할게요.”
“진짜 하는 거야? 이 수돌이는 너무 두근거려서 못 보겠어!”
“흥. 이미 팬티도 실컷 주물럭거렸던데. 뭘 그렇게 수줍어하는 거냐!”
“공돌이님. 팬티도 주물럭거렸다뇨! 말은 맞긴 하지만, 그건 빨래해주다 보니 그런 거잖아요. 이상하게 말하지 마세요.”
이 녀석은 뭘 하려는 거기에 이렇게 떠드는 걸까? 신경 쓰여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오빠. 사랑해.”
뺨에 쪽 소리를 내며 뽀뽀하는 걸 느꼈다.
“이 바보야. 입술에 해야지. 뺨에 해서 뭐해! 마우스 투 마우스로 딥DEEP하게 마음을 전해야 할 거 아냐!”
“에엣! 그치만요. 그치만요. 그러니까 말이죠. 입술에 하는 건 뭐랄까 말이죠. 했다간 심장이 터져서 죽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일단 살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헛! 소! 리! 부끄러워 죽겠다는 녀석 중에 진짜 죽은 녀석, 한 번도 본 적 없다.”
“그치마안~”
여동생이 부끄러움을 털어내려는 듯, 좌우로 데굴데굴 굴러댄다.
“자아. 리트라이다. 입술 정도는 간단히 끝내버리고, 다음엔 더 굉장한 일도 해야지. 예를 들면, 결혼 첫날밤의 예행연습이라던가.”
“첫날밤? 꾸아아~.”
선희는 뒤로 넘어가며 매트리스에 머리를 박았다.
침대가 삐거덕댄다. 얼씨구야. 혼자 잘도 논다.
다시 매트리스 속 스프링들이 삐그덕 소리를 냈다. 이번엔 그녀가 강아지처럼 네발로 기어 내 위에 올라온 듯하다.
이 녀석. 진짜 뭔가 하려는 건가? 슬슬 일어나야겠다.
음냐. 음냐. 소리를 내며 막 잠에서 깬 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선희가 일어나지 못하게 어깨를 눌렀다.
어라?
조금 예상외의 상황.
혹시 이 녀석. 내가 깨어 있단 걸 알고서 하고 있었나?
아니, 그보단 마음의 준비 중에 내가 움직여버리니 반사적으로 붙잡아버린 거겠지.
그래서인지 잠시 동안 서로 매우 뻘쭘하게 아무 말이 없었다.
선희가 약간 긴장된, 하지만 약간 야한 숨소리를 내며 침을 삼킨다.
“오빠. 더 이상,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게 되었어요. 그녀가... 와버렸어요. 이게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라요.”
그녀라니? 무슨 소리지? 어제 당한 일에 관련된 건가?
어깨에 가해지는 무게가 점점 늘어난다. 그녀가 몸을 내 얼굴 쪽으로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 눈을 뜨고 도망쳐야겠지만, 그러면 ‘오빠와 여동생’이란 관계에서 뭔가로 완전히 변해버릴 듯한 기분이 들어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계속 자는 척하고 있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입술이 살짝 닿은 순간, 똑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선희는 그 소리에 놀라, 우아앗! 소리를 지르며 튕기듯이 펄쩍 뛰더니,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에이. 중요한 때에….”
여동생이 ‘영차’하고 일어나더니 문으로 총총총 뛰어갔다.
십년감수 했다. 이 틈에 문소리에 잠이 깼다는 것처럼 일어났다. 주변에 블라인드도 다 걷어두었다.
여동생이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짜잔~! 나리 나리 최나리양. 문병왔슴다!”
한 손에 쇼핑백을 든 기운 만땅의 여자애가 팔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 언니예요? 어서 와요.”
선희가 인사하자, 나리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선희는 잠시 주춤했지만,
“예이~!”
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학원 선후배 사이인 만큼 여전히 사이가 좋다. (학원에도 선후배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로 알고 지낸지는 나보다 오래되었다.
그러고 보면 나리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첫 만남도 내가 막 지금의 가정으로 옮겨왔을 때, 밤중에 선희를 찾아왔다가, 처음 보는 남정네가 나오자 도망쳤다는 시추에이션에서부터였다.
그 부끄럼 많던 나리가 고양이 입 미소를 띠고 성큼성큼 다가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마조이스트라도 병원에 실려 올 정도로 하다니, 선진이는 의외로 완전 말종이구나.”
“상큼한 얼굴로 병문안 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냐?”
“앞에 ‘의외로’라는 말을 붙여준 데에 감사하라고.”
아아. 그 때가 그립다.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이렇게 막 말하지 않았는데.....
모두에게 상냥한 아이돌. 그녀가 그리웠다.
왜 나에게만 불친절할까.
내가 뭘 잘 못 했던 걸까?
“나리야. 근데 쇼핑백에 든 것들은 뭐야?”
“어제 말했잖아. 다음엔 채찍과 양초를 준비해오겠다고.”
그녀는 들고 온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키위라는 열대 쪽에 치중된 과일들이었다.
나리가 바나나를 하나 뜯어서 내밀었다.
내 손이 깁스로 둘둘 말린 걸 보고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껍질까지 벗겨 입에 대주었다. 감사히 베어 먹었다.
“근데 어쩌다 그렇게 다쳤어?”
“집이 높은 데 있다보니, 계단에서 굴러서….”
“거짓말. 계단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떨어져도 그보단 덜 다치겠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
어젯밤…. 그러고 보면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건 나리와 헤어진 직후다. 어쩌면 나리와도 관계가 있는 걸지도.......
“선진아?”
대답을 않자 나리는 답답하단 얼굴을 했다.
“아. 미안. 그런데 별일 없었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으응….”
그녀는 자신을 믿고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흥. 그래. 난 힘이 안 된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네 뇌세포는 위대한 데, 내 뇌세포는 한심해서 합쳐봤자 에너지 소모만 심해진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머리에 핀 백합은 꿀벌이나 부를 수 있으면 다행이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근데 그거 장식 아니었냐?”
"결국 내 몸엔 관심 없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응? 뭔가 이상한데?"
"역시나! 나랑 아는 사이가 된 건 오직 몸만이 목적이었구나! 귀축!"
그녀는 문병용으로 가져왔던 파인애플의 머리꼭지를 잡았다.
뾰족뾰족 가시가 돋친 둔기형 식물을 머리위로 들어 올리더니 힘껏 내리찍으려 했다. 그 망나니의 칼부림과도 같은 흉행을, 온몸이 깁스 투성이인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침대가 피에 물들겠구나 하고 생각한 그 순간, 그것을 막아준 것은 여동생 선희였다.
"오빠는 제가 지킬 거예요."
뾰족한 가시들에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자세히 보니, 어느새 양과 염소의 손인형들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 동물들은 모두 단단한 뿔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동물들이라서 가시가 헝겊을 뚫는 일 없이 완벽한 방어를 하고 있었다.
나리는 놀란 얼굴로 입을 연다.
"그러고보면 선희는 최강의 파이터가 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가장 강력한 초합금이 달린 글러브로 계속 수련해왔다는 전설이....... 그, 그렇지만 난 전설 따위 믿지 않아!"
나리는 다시 한 번 파인애플을 높이 들어 내리쳤다. 선희는 클로(claw)처럼 길게 뻗은 염소뿔을 이용해 파인애플을 찍어 넘겼다.
허점을 드러낸 나리.
선희는 '요압!'하는 이상한 기합을 내지르며 둥글게 말린 양의 뿔로 나리의 배에 펀치를 날렸다. 나리도 '으악'하는 과장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 사이, 선희는 도주하기 위해 바퀴달린 내 침대를 밀어서 도망쳤...어야 하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바퀴의 고정레버들을 돌려야지 움직인다.
저 푼수.
'끼잉'하고 용을 쓰다가, 내가 말해준 뒤에야 고정 장치의 존재를 알게 된 선희는 레버를 돌리려하였다. 하지만 그 뒤엔 이미 히죽 웃고 있는 악마의 모습이 있었다.
"지금 건 꽤나 건방졌어~?"
나리는 선희의 웃옷 밑의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간지럼에 약한 선희는 자지러지며 내 몸 위에 쓰러져 웃어댔다.
"몸도 쪼그만하면서 건방지게 브라도 하고 있잖아?"
"어..언니, 그만 둬요. 푸하하하하하."
나리는 소매에서 만국기를 꺼내는 마술사처럼, 선희의 슴가가리개를 옷 속에서 꺼냈다.
근데 이것들아. 다 좋은데, 내 몸 위에서 하지마라. 난 환자라고. 갈비뼈가 부러져서 무지 아프단 말이다!
하지만 녀석들은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무시한 채 장난질에만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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