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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녀망상 이미지네이터 ~사계편~ 봄(2/3)글쓴이Sourjelly
날짜 11-04-28 15:26조회2159

“푸후후…그래서 수업은 어떻게 됐니?”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선배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드는 승준이 투덜거렸다.

『헤헤헤우-! 히히히우-!!』

사람 머리통만한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공깃돌을 들고 던지고, 받으며 이리저리 팔랑거린다. 조금 전까지도 승준에게 신나게 주먹 마사지를 시술해주던 거인 망상체가 부실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인순이, 금순이와 함께 공깃돌을 던지며 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부실 구석에서 놀고 있는 망상체들을 쳐다보는 승준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흔들린 콜라병 거품마냥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번에 데려온 아이는 착한아이네.”

“이 얼굴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오나요?”

왼쪽 눈이 퍼렇게 멍이 들고 양쪽 뺨이 풍선마냥 부풀어있는 승준이 태평한 소리를 하는 선배에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따졌다.

“후후, 난 또 저번처럼 업어오다가 넘어진 줄 알았지.”

‘거짓말 하지 마!’

승준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해 외면해버리는 선배를 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승준아, 입부희망서 언제 돌려 줄 거니? 선생님께 제출해야하는데.”

“아, 안돼요. 아직은 안돼요.”

선배가 입부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정색을 하는 승준. 그렇다, 승준은 아직 망상체 연구부의 정식 부원이 아닌 것이다. 선배는 승준을 적당히 놀려주고 입부시키려고 했지만, 그런 선배의 장난 덕분에 입부할 의욕이 싹 달아난 승준은 죽더라도 망상체 연구부에 가입할 생각이 없었다.

“…곤란해, 승준아. 선생님이 다음 주까지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선배. 그보다 질문이 있어요.”

자신을 압박해오는 선배의 오오라에 황급히 화재를 돌리는 승준. 선배는 자신의 말을 자르는 건방진 승준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고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말을 잘라놓고도 미안했던 것인지, 승준도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정좌했다.

“선배, 제가 망상체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살짝 기울이는 선배.

“전에 이야기 하셨잖아요. 앞으로 햇빛으로 망상체를 처리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응 그랬지.”

“그렇다면 알려주세요! 앞으로 어떻게 망상체를 퇴치해야 할지!”

망상체 연구부실의 왁자지껄하던 공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금순이, 인순이와 함께 놀고 있던 거인 망상체를 비롯한 연구부실 여기저기에서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크고 작은 소음을 내던 망상체들이 입을 다물고 승준과 선배를 향한다.

사방에서 집중되는 시선에서 따가움을 느끼는 승준. 차마 다른 곳을 쳐다볼 수 없어 선배의 얼굴만 뚫어져라 주시했다.

“하아-.”

짧은 한숨과 함께 붉은 빛으로 반짝이는 찻물을 내려다보는 선배. 그녀는 승준의 다급한 얼굴을 외면한 채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준아.”

“예?”

“승준이 너는 말이야. 망상체를 ‘퇴치’해야만 할 대상이라고만 생각하는 거니…·?”

그렇게 말하며 티스푼을 들고 찻잔 안을 소리 없이 휘젓는 선배.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승준이 고개만 갸웃거리자, 티스푼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승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승준의 굳은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예. 아직까지는…요.”

차마 선배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말 꼬리를 흐리며 선배를 외면하는 승준. 여태까지 망상체를 귀신, 괴물로 생각해오던 승준에게 있어서 선배를 포함한 망상체 연구부에서 만난 망상체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였다.

“후후…재미있는 대답이네.”

손벽을 짝! 치며 입을 가리는 선배.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바닥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앙상한 거인 망상체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선배의 백옥 같은 손이 매끈매끈 할 것 같은 망상체의 대머리를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자, 거인은 어린아이처럼 헤헤 웃으며 선배의 배에 머리를 기댔다.

“어떡할까…?”

짧은 침묵이 부실 안을 감돌았다. 대답이 없는 선배의 모습에 좋은 대답을 듣기는 힘들 거라고 예상한 승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선배가 돌아서며 승준을 붙잡는다.

“기다려 승준아. 아직 이야기 끝나지 않았잖니.”

“가르쳐주시지 않을 거잖아요.”

“흐응-그건 그렇지만.”

선배의 맥 빠지는 대답에 한숨만 푹 쉬는 승준이 다시 돌아서자, 이번에는 선배 옆에서 멀뚱하게 서있던 금순이가 승준에게 달려가 승준의 손을 붙잡고 돌아 세웠다.

“왜 가르쳐주지 않는지는 안 물어보는 거니?”

“제가 망상체를 적대시하니까…잖아요.”

승준의 대답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인순이가 건네주는 코트를 어께에 걸치는 선배. 승준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금순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코트 주머니에서 손바닥 만 한 메모장을 꺼내 그것을 건네준다.

“틀렸어.”

“예…예?”

메모장을 받은 금순이가 다시 승준에게 돌아오는 동안 미뤄왔던 대답을 내뱉는 선배. 그녀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승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금순이가 그의 얼굴 앞으로 메모장을 들이민다.

“이게 뭐에요?”

“정답.”

금순이에게서 받은 메모장을 들고 그것을 펼쳐보는 승준. 그 메모장 가장 위에는 예쁜 글씨로 또박또박하게 ‘잊어버리지 말고 가져올 물건’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큼지막한 다섯 글자가 승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부 희망서?”

“잊어버리지 말고 꼭 가져와야 한다?”

인순이와 금순이의 손등을 쓰다듬어주는 선배가 방긋 웃음 지었다.




다음날 오전. 아침부터 왁자지껄한 교실과는 다르게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학생이 교실 가장 뒷자리 창가에서 앉아있다. 물론 그 강아지는 승준이다.

아침과 쉬는 시간에는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클럽 부실에 가는 것을 엄중하게 금하고 있는 모란고교의 특성상, 점심시간 아니면 10교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터라 조바심이 난 승준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선배 이름도 모르고 반도 모르네….’

자신의 무계획성 행동에 머리만 벅벅 긁는 승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여자만 바글바글한 3학년과 2학년 교실을 돌아다녔건만,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조회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덕분에 승준의 손에 쥐어져있는 입부희망서는 구겨진 정도가 아니라 걸레짝이 되어서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상황까지 몰려있는 상태이고 말이다.

-드르륵!

승준이 제자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자 않아 교실 앞문이 열리고 누군가 교실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승준은 처음에 그것이 담임선생님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은 파릇파릇한 10대의 소녀였다.

“………와아.”

승준의 입이 감탄으로 딱 벌어졌다.

교실의 멀리에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집중될 만큼 매끈한 S라인과 대충 봐도 출렁임이 눈에 들어오는 풍만한 가슴, 부러질 듯 가늘고 미끈한 목선과 길고 매혹적인 속눈썹. 갸름한 얼굴에 우수에 찬 눈동자가 아름다운 소녀….

…의 뒤를 따라오는 시커먼 스파게티 때문이었다.

“………….”

잔뜩 울상인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후다닥 돌아가는 은미. 그리고 그 뒤를 따라 1000인분은 될법한 스파게티 덩어리가 꾸물꾸물 따라간다.

『쁘루쁘루쁘루르뿌르….』

교실천장을 가득 메울 것처럼 거대하고, 끈적끈적한데다가, 가늘기까지 한 스파게티의 까만 면발은 먹물로 데친 것처럼 미끈하고 반짝인다. 면발에 뮤코다당이 풍부해 보이는 이 망상체는 면발 속에 숨겨진 하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사방을 둘러보고 있다.


‘너는 무슨 어시장 생선 아줌마냐?! 왜 망상체들이 생선 본 고양이마냥 줄줄이 굴비로 따라다니는 건데?!’

머리를 쥐고 절망하는 승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자리에서 책을 펼친 채 책상에서 엎어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은미가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은미야, 어디 아파?”

“으, 응. 속이 좀….”

창백한 얼굴로 책상에 얼굴을 파묻는 은미.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로 기어 다니는 짜파게티 괴물(Crawling Chapagetti Monster)이 꾸물거리며 자리를 잡는다.

『삐루쁘르쁘르삐르루….』

돌고래처럼 높은 음의 울음소리와 부글부글 보글보글 거품 소리를 번갈아가며 내는 짜파게티가 가느다란 면발을 한 대 뭉쳐 손가락만한 굵기로 모으더니 은미를 푹 찌른다.

“힉?!”

『뿌르삐-?!』

갑자기 옆구리를 찔리는 바람에 놀라서 움찔거리는 은미. 그런데 은미를 찌른 망상체도 깜짝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선다. 자신이 찔러놓고 말이다.

『뿌르뿌르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미의 눈치를 살피던 망상체. 은미가 반응이 없자, 다시 다가가서 그녀의 옆구리를 콕콕 찌른다. 그리고 은미가 괴로워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또 다시 후다닥 뒤로 물러선다.

“………….”

한사람과 한망상체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며 할 말을 잃은 승준은 이번에는 그냥 내버려 둬도 될 것 같다고 안도하고 입부 희망서를 곱게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저 정도면 은미가 알아서 해결하겠지.’

…같은 안일한 생각과 함께 말이다.

-드르륵!!

“오호호홍~ 여러분! 좋은 아침이에요~오호호홍!”

때마침 정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오는 백발의 담임선생님이 아침부터 좋은 일이 있는 건지 싱글벙글 웃으며 교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서는 인물이 있다.

“선생님! 은미가 아픈 거 같은데요. 양호실로 보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잘도 은미의 상태를 파악한 종후가 은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망상체가 자꾸 콕콕 찌르는 바람에 움찔거리고 있는 은미는 누가 보기에도 어딘가 심각하게 아픈 사람이었고, 그런 은미를 보며 걱정한 은미의 짝꿍도 거들어서 은미를 양호실로 보내는 것을 추천한다.

“어머, 어머. 은미양? 얼굴이 파래요, 어서 양호실에 가보세요.”

“예, 예….”

담임선생님의 말에 은미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다. 덕분에 은미가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깜짝 놀란 짜파게티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뿌르삐양-?!』

겁쟁이 망상체가 비명을 지르며 교실뒤편으로 후다닥 도망간다. 망상체가 물러나는 경로에는 수많은 책상과 아이들이 앉아있었지만, 망상체는 유령처럼 그들을 투과해서 교실 뒤편으로 숨어들었다.

“그럼…죄송합니다.”

식은땀과 신경과민으로 인해 피로에 절은 얼굴로 담임선생님께 꾸벅 인사하는 은미. 그녀는 교실을 나가면서도 곁눈질로 교실뒤편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망상체를 불안한 눈빛으로 훔쳐본다. 그리고 교실 밖으로 나서는데….

“자! 그러면 여러분, 출석 시작합니다~?”

‘어?!’

담임선생님이 출석부를 펼치는 순간 위화감을 느끼는 승준. 은미가 나간 교실 앞문과 교실 뒤편을 번갈아서 쳐다본다. 교실 뒤편에 찰싹 달라붙어서 꿈틀거리고 있는 망상체는 은미를 따라가지 않은 것이다.

“정미소~? 윤은미~? 정-으음…지혜양? 한승희~?”

‘뭐, 뭐야? 왜, 왜 안 따라가?’

선생님의 이름호명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승준을 짓누르는 불길한 예감. 어느 별 외계언지 모를 요상한 소리를 내는 망상체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삐르뿌르뿌르삐르뿌르………쁘루?』

‘히, 히익?!’

망상체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승준과 눈이 마주쳤다. 찔금 놀란 승준과는 달리 친구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쁘게 미끄러져 다가오는 짜파게티. 면발을 파닥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발랄하기 그지없다.

『삐루~쁘루삐-!!』

‘에이 씨 몰라….’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는 망상체를 보고 해탈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승준의 눈가에 한 방울 눈물이 맺혔다.



한편, 양호실에 발을 들이는 은미의 발은 무겁기 짝이 없다. 이미 은미의 부모님께 사정을 들은 뒤라, 은미를 알아보는 양호선생님도 별다른 말없이 은미에게 양호실 침대를 내주었다.

“하아-.”

깊게 한숨을 쉬는 은미가 오늘도 양호실 침대 신세를 진다. 은미의 부모님도, 병원의 의사도 은미가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인지 모른다. 은미는 굳이 부모님께 설명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를 괴롭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믿지 않을게 분명하고 걱정만 끼칠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은미는 문뜩 어제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목을 조르던 거대한 괴물과 어떤 목소리. …목소리.

‘저기, 괜찮아? 너?’

‘…으, 으응.’

‘괘, 괜찮아….’

‘그래?’

짤막한 대화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 대화를 하는 동안 자신의 목을 쥐고 있던 검은 괴물은 모습을 감췄고, 그렇게 그녀는 잠깐이나마 자유를 얻었다.

‘누구지?’

머릿속 한가득 그런 의문이 그녀를 자극했다.

-딩동뎅동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침에 잠시나마 은미를 따라다니던 촉수괴물은 온데 간데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 교실에 남아있는 것이겠지. 은미가 다시 교실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들러붙을 것이 분명하다.

‘교실 가기 싫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교실로 돌아가기는 죽도록 싫어진 은미가 집에서 받아온 진정제를 입에 털어 넣고 몸을 눕혔다. 얇은 양호실의 시트와 차가운 공기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괴롭히는 괴물이 없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으음-.”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약에 취해서 한참 잠이 들었어야 할 은미가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던 은미. 아직 약이 덜 깬 덕분에 찾아오는 두통과 어지러움을 느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암-.”

작게 하품하며 일어선 그녀는 양호실 구석의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목을 태우는 갈증을 해소했다.

“은미야, 이제 괜찮니?”

“예에…조금 어지러워요.”

약 때문에 어지러운 거지만.

“부모님 호출했으니까, 힘들면 더 자도 돼.”

상냥한 양호선생님의 말씀에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다시 침대로 돌아온 은미. 침대에 몸을 누인 그녀의 눈이 나비가 꽃잎 위에 안착하듯 사르르 감긴다.

『극그그극그극…!!』

돌을 긁는 날카로운 소음이 은미를 자극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막 잠에 빠져들려고 했던 은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뭐지?”하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막상 그녀가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그 순간에는 쥐죽은 듯 조용하기 짝이 없다.

『그그그…가가각!!』

다시금 들려오는 그 소리에 침대에 누우려던 은미가 벌떡 일어섰다. 새하얀 양호실 커튼을 걷어내자, 조금 전까지 책상 앞에 앉아계시던 양호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마음에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는 은미.

『그극, 각각-! 그그각-!!』

은미의 심장이 터질듯이 박동한다.

식은땀이 그녀의 뺨을 타고 턱선을 따라 바닥으로 추락했다.

“…선생님?”

조용히 양호선생님을 불러보는 은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양호실의 문은 열려있고, 양호실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선생-?!”

그녀가 양호실의 열린 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은미는 악몽과 마주쳤다.



“크아아악-!! 이젠 정말 못 참아!!”

『삐루삐양-?!』

3교시 쉬는 시간.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승준이 크와앙 하고 울부짖었다. 투명하지 못해서 졸라 짱 세지는 않지만 겁먹은 망상체가 펄쩍 뛰어오르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 승준. 그는 짜파게티의 면발을 잡고 화장실로 한걸음에 달려와서 분통을 터트렸다.

“너, 너 임마! 그만두지 못해!”

『쁘루삐루?』

수업 받는 중에도 계속 옆구리를 찌르는 망상체 덕분에 승준은 지금 노이로제에 걸리기 직전이다. 수업이 지루해도 잘 수 없었다.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도 집중 할 수 없었다.

그저 옆구리를 찔릴 뿐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왜 사람을 가만 놔두지 못하는 건데?!”

두 눈에 시뻘겋게 핏줄이 선 승준이 으르렁거리자, 겁먹은 짜파게티는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화장실 구석으로 몰렸다.

『삐루쁘루으우우….』

“아오 빡쳐! 그냥 거꾸로 말해! 외계어 하지 말고! 그냥 거꾸로 말하라고! 내가 그냥 이 대가리에서 번역기 돌려서 알아서 해석해 줄 테니까!!”

자신의 관자놀이에 삿대질을 하며 팔딱팔딱 뛰는 승준의 모습에, 눈물샘도 보이지 않는 커다란 눈알을 면발로 가리며 훌쩍거리는 시늉을 하는 짜파게티. 구석에서 찌그러진 채 더 이상 승준을 찌르지 않는 짜파게티의 모습에, 씩씩거리던 승준도 차츰 분노를 가라앉혔다.

“하아-. 아이고…내가 정말 못살아.”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뱉는 승준. 자신에게 이런 골칫덩이를 붙여놓고 사라진 은미도 그녀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마냥 그녀 탓만 할 수도 없어 속병만 앓을 뿐이다.

“너, 앞으로 한번만 더 내 옆구리 찔러봐. 그냥 콱!”

『삐냐앙-!!』

승준이 주먹을 들고 한 대 쥐어박을 기세로 협박하자 겁을 먹은 짜파게티가 다시 움츠러든다. 망상체에게 시달리느라 진이 빠진 승준. 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전력으로 꿈나라 급행열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아-.”

승준은 깊은 한숨과 함께 화장실 세면대에서 물 세수로 조금이나마 피로를 털어냈다.

“푸하- 하아. 시원하다.”

승준이 거울을 보며 물기를 털어내고 있으려니 선배의 그림자가 남자화장실 문 앞을 스치듯이 지나간다. 까만 치맛자락이 남자화장실 문 근처를 펄럭이며 모습을 감췄다.

“먹는 거 가지고 화장실 가면 못써요~”

“응?!”

갑작스러운 선배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승준이 재빨리 화장실 출구를 쳐다봤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뭐, 뭐야…?”

당황한 승준은 서둘러서 남자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분명 선배의 목소리였다, 승준은 그렇게 확신하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좌우로 텅 빈 복도만이 승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선배? 선배? …배? …배? …?

선배를 부르는 승준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이상하리만치 길게 복도를 울렸다.

오전의 3교시 후 쉬는 시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복도.

뭔가 잘못된 것을 느낀 승준이 다시 반대편 복도를 향해 돌아봤지만, 그곳에는 새카만 면발이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이다.

“너 임마. 비켜.”

『쁘루삐루!』

그 한마디에 즉각 반응해 꼬물꼬물 승준의 뒤로 돌아가는 짜파게티. 그리고 그곳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는 복도가 승준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부르던가, 도대체 어디 간 거야?’

가득이나 짜파게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승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애써 참으며 선배를 불렀다.

“선배! 숨지 말고 나오세요!”

-오세요! 오세요! 세요! 세요! …요! …!

여전히 아무도 없는 스산한 복도는 분노한 승준의 감정을 불안함으로 치환한다. 행여 승준이 모르는 사이에 쉬는 시간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교실이 100%방음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복도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묵직한 공기 속에서 승준의 발소리와 짜파게티의 ‘삐루쁘르’하는 울음소리만이 작은 메아리가 되어 복도를 울렸다. 학생들이 말끔히 사라진 학교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두 팔에서 돋아나는 닭살과 오싹한 소름에 두 팔을 끌어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승준이 발을 멈췄다. 복도 중앙을 향하던 그의 눈앞에서 천천히, 한걸음씩 계단을 올라오는 한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구?”

선배는 아니다. 만약 선배였다면 새까만 원피스를 입고 있겠지만, 승준의 눈앞에서 서 있는 소녀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다.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서 머리핀으로 고정한 머리. 조회시간에 양호실로 갔던 은미다.

“아, 저기….”

초점 없이 공허한 눈동자로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는 은미를 보고 말을 걸어보려던 승준은, 순간 자신이 은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준이 은미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 인사부터 나눠야 할지 고민을 하는 동안 비틀거리며 승준을 향해 걸어오던 은미. 그리고 그녀가 무너졌다.

“와앗-?!”

예고도 없이 쓰러지는 은미를 보고 달려가 그녀를 안아든 승준. 그는 창백하게 질려서 “무서워, 싫어, 살려줘”를 연발하는 은미를 가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녀의 어께를 잡고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

“싫어…무서워…살려……핫?!”

반짝! 하고 제정신을 되찾은 은미가 눈을 깜빡인다. 머리가 아픈 것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신음성을 내뱉는 그녀. 승준은 그런 은미를 보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의 교복 여기저기가 먼지투성이에 양쪽 무릎이 까여서 피가 나고 있었다.

“저기, 너. 괜찮아?”

“으으응…응? ―끼야아아앗?!”

『쁘루삐야앙-?!』

마침내 두통이 가라앉은 은미가 승준을 향해 돌아보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승준 뒤에서 바짝 달라붙어 있던 짜파게티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엉덩방아를 찧은 은미가 새파랗게 얼굴로 두 손으로 바닥을 기어 뒤로 물러선다. 그런 한 사람과 한 망상체를 보며 승준은 뒤통수만 벅벅 긁는다.

“하하, 이것 참.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저 놈은 겁쟁ㅇ….”

“끼야아아악--!!”

“나도냐?! 나도 무서운 거냐-?!”

은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다가 비명을 한바가지 얻어먹은 승준이 절규했다. 하지만 그의 절규와는 무관하게 승준의 등 뒤에서도 비명소리가 복도를 요란하게 흔들었다. 짜파게티의 비명소리였다.

『쁘루삐이이-!!』

승준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벽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이빨에 면발을 물린 짜파게티가 있다. 바닥을 쓸고 다니는 가장 아래쪽의 면발이 이빨에 물린 채 이빨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동거리는 짜파게티.

승준은 멀쩡한 복도의 벽이 벌어지며 튀어나오는 물체를 보고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어…어-??”

-그그그그그각…!!

멀쩡한 벽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곧 새하얀 입술의 형태를 갖춘다. 그리고 그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검은색의 열 손가락. 새하얀 입술을 꼭 닮은 시커먼 입술과 이빨이 달린 덩어리가 입술을 강제로 벌리며 빠져나오고 있었다.

『헤헤헤헤우-!! 히히히우-!! 인다죽! 다는먹어씹! 케케케케으-!』

복토로 진입한 덩어리의 머리에는 세로로 벌어진 입이 달려있고, 그 아래에는 두 개의 충혈 된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눈 양옆으로 뻗어 나온 것은 근육질의 팔. 그 두 팔은 팔뚝 길이만으로도 승준의 키를 넘어설 만큼 거대했다.

『흐흐흐으…지야어먹 다겠있맛-!』

커다란 손으로 짜파게티를 손에 쥔 망상체가 입을 벌렸다.

-으적

『삐야앙-! 쁘루쁘-!』

절반, 아니 삼분지 일 만한 사이즈로 줄어들은 짜파게티가 몸을 최대한 늘리더니, 바닥을 기어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발버둥 친다. 검은 덩어리가 짜파게티의 절반을 입에 물고 있음에도 말이다.

『쁘루삐이-!! 쁘루삐이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는 짜파게티. 그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승준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으라챠-!!”

『쁘루삐이-!!』

그는 짜파게티의 면발을 쥐고 잡아당겼다. 비록 웬수같은 녀석이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잡아먹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힘껏 잡아 당긴다.

“으랴아아악--!”

-찌지직!!

젖먹던 힘까지 다해 잡아당기는 승준의 손에 의해 한 움큼 찢겨진 면발이 하늘을 날았다. 머리통만한 사이즈만 남은 짜파게티 몸의 ‘일부’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곳은 하필 은미의 눈앞이다.

“히, 히이이이-!!”

그 모습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람소리만 내던 은미. 그녀는 결국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그리고 짜파게티의 남은 몸뚱이를 모두 씹어 삼킨 덩어리 망상체 앞에서 서있는 승준도 까무러치기 일보직전이기는 마찬가지다.

『야거 을먹어씹 지까뼈 득드까 득드아. 헤헤헤크-!!』

“히, 히히히…하, 하하….”

터질듯이 몸부림치는 승준의 심장. 이성은 ‘도망쳐라’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승준은 오금이 저려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바지에 실례를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 상태였다.

『까을좋 이편 는이죽 에전기먹-?』

‘하…하하하…그냥 안 먹으면 안 되겠니?’

이런 위급한 상황에도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저주하던 승준은 자신의 바지를 잡아당기는 감촉에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향했다.

『쁘루삐-! 삐르뿌-! 삐이이--!!』

1000인분에서 2인분으로 줄어들은 짜파게티가 조그만 눈으로 승준을 올려보며 그의 바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헤헤헤케-! 다니습겠먹 잘!』

-후오옹-쿠콰과과-!!

세워놓기만 해도 천장에 닿을 것 같은 거대한 팔이 화장실 입구를 박살내며 승준에게 날아온다.

“히, 히익?!”

-쿠챠앙!!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향해 몸을 날리는 승준. 그의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가는 괴물의 오른팔이 화장실 반대편의 교실 문과 창문을 박살내며 멈춰 섰다. 압도적인 크기와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질려버린 승준의 이빨이 따닥따닥 떨렸다.

『헤헤헤헤헤그―!!』

거대한 팔에 비해 빈약한 다리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망상체. 잡히면 끝장이겠지만 도망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승준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쁘루삐이-!!』

“으, 으갸아-!!”

짜파게티를 옆구리에 끼고 어설픈 기합과 함께 덩어리 망상체를 등지고 달리는 승준. 몇 걸음 앞에서 쓰러져 있는 은미를 부축하며 소리 질렀다.

“일어나! 야! 일어나라고-!!”

대답은 없다. 승준은 줄이 끊어진 인형마냥 축 늘어진 은미를 한쪽 팔로 어께를 부축하고 달리려고 했지만 그대로 주저앉았다. 승준의 힘으로 기절한 사람을 한쪽팔로 끌고 가는 건 역시 무리였다.

“야! 짜장면! 머리위에 올라타!”

『쁘루쁘루-!』

승준이 바닥에 던져놓은 짜파게티가 승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머리위에 안착한다.

-드득-! 드드득-!!

『헤헤헤헤헤으…!!』

나무 바닥이 갈라지는 소음과 함께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승준의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다. 손만 뻗어도 닿을 곳에 있는 승준을 보며 여유롭게 웃는 덩어리 망상체가 천장까지 손을 올려 바닥으로 내려찍었다.

-후옹-! 쿠쾅-!!

“히익!?”

은미를 안아들려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승준. 뒤를 돌아본 승준이 자신의 엉덩이 근처에서 대리석 바닥을 와장창 깨부수고 둥근 크레터를 만든 망상체의 주먹을 발견한다.

“으, 으아아아악--!!”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깨문 승준이 은미를 안아들고 달린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단숨에 복도 끝을 향해 달려간 그가 계단을 뛰어내려올 기세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헥, 헥…하아, 아오…미치겠네-!! 뭐야 저거??”

덩어리 망상체, 모양은 다르지만 말투를 본다면 분명 그 자식이다. 승준은 그렇게 확신했다.

“근데 그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선배가 처리했잖아? 어떻게 도로 튀어 나온 거야?”

하지만 승준의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드, 득 드드득…!!

『헤헤헤헤케…!』

나무판자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탐욕에 절은 음흉한 웃음소리가 가까워진다. 그와 비슷하게 승준의 허리에서 끊어질 것 같은 통증도 찾아 왔다. 급한 마음에 괴력을 발휘해 은미를 안아들고 아래층까지 내려왔지만, 잠깐 긴장이 풀리자 금세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윽! 억! 크윽-!!”

한 발 한 발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승준의 허리.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머금은 채 층계에서 가장 가까운 교실로 달려온 승준은 다 늙은 할아버지 같은 처량한 기합소리와 함께 책상위에 은미를 눕혔다.

-탁! 타닥! 닥닥, 타다닥!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칠판을 두드리는 소음이 허리를 문지르는 승준의 귀를 자극했다. 바닥에서부터 뻗어 나와, 새하얀 분필을 들고 칠판을 경쾌하게 두드리며 무언가를 써내려가는 가녀린 팔이 승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바닥에서 뻗어나온 새하얀 팔’이라는 사실에 직감적으로 선배를 떠올린 승준이 망상체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승준이 말을 걸어오자마자 분필을 뒤로 집어던지는 팔. 그리고 승준에게 쪼르르 달려와 그의 왼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

승준의 왼손을 조몰락거리고 손등을 맞대고 비비적거리는 새하얀 팔. 승준은 자신의 손을 향한 망상체의 애정공세에 모습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세 글자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읊었다.

“…음…누구더라? …보, 봉선이?”

『―!!』

비록 입이 없어서 소리는 지르지 못해도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승준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것으로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봉선이. 그런 그녀(?)의 새하얀 손이 바람을 갈랐다.

-찰싹!

“으갹?! 왜, 왜 때려?!”

『찰지구나.』

엉덩이를 맞고 폴짝 뛰는 승준의 옆으로 노이즈가 낀 선배의 목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울컥한 승준이 칠판을 노려보자, 분필로 그려진 선배의 초상화가 미소 지으며 승준을 마주하고 있다.

『안녕? 승준아.』

“선배!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아, 미안해. 지금 선생님 심부름으로 조금 바쁘거든.』

칠판 속에서 서류뭉치를 들고 흔들어 보이는 선배. 승준은 은미와 교실 문을 번갈아 쳐다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것보다 선배, 망상체요! 망상체!”

『응? 뭐가?』

승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선배. 분필로 그려진 찻잔을 들고 여유롭게 향기를 음미한다.

“선배가 처리한 덩어리 망상체가 다시 나타났어요!”

『그래?』

‘그래는 무슨 얼어 죽을 그래야?!’

남에 속마음도 모르고 태평하게 대답하는 선배의 모습에 승준의 혈압이 펌프질하듯 오른다. 승준의 어께를 다독여주는 봉선이가 없었다면 칠판에 대고 박치기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쿵! 쿵!

육중한 체중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덩어리 망상체의 요란한 발소리에 새파랗게 질린 승준이 칠판을 노려보며 절규했다.

“어떡하죠? 어떡해요! 저는 망상체를 퇴치하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고요!”

『후후, 진정해 승준아.』

“이 상황에 진정하게 생겼냐고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승준은 교실 문 앞 책상 위에 기절해있는 은미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안아들었다.

“끄으윽-!”

은미를 안아든 승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저질체력의 위용을 자랑하며 은미를 교실 한 구석으로 데려가 눕혀둔 승준. 그가 은미를 내려놓고 허리를 펴자, -우두둑! 하고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 이러면 어떨까. 임시방편을 알려줄게.』

홍차를 홀짝이며 서류를 보고 있는 선배가 말했다.

『일단 승준이 너는 분필을 준비해』

봉선이가 건네주는 분필을 쥔 승준. 선배가 가리키는 칠판의 빈 공간에 분필을 가져간다.

『준비물은 공상. 필수품은 염원. 강하게 바랄수록 네 의지에 보답하는 아이가 태어날 거야.』

“…예?”

『지금 당장 너를 괴롭히는 망상체에게 벌을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무언가를 상상해. 그리고 그걸 그려봐.』

승준은 선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충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하는지는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자의’로 망상체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끄응…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하지만 빈약한 상상력을 가진 승준에게 그것은 지나친 요구였다. 칠판에 분필만 대고 선 하나 긋지 못하는 승준의 모습은 선배마저도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승준아. 그럼 우리 한번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아, 예에-.”

유치원 선생님마냥 승준을 말로 다독여주는 선배. 선배를 대신해서 봉선이가 승준의 손을 잡아준다.

『오늘 아침 식사는 접시 위에 소시지 다섯 개. 접시가 좁아서 한 개는 밑에 깔았어.』

‘느끼한 아침이군.’

선배의 말에 아침에 먹었던 된장찌개를 간절히 생각하던 승준. 그는 자신이 칠판에 그린 커다란 동그라미와 그 안에 그려진 네 개의 타원, 그리고 옆으로 눕혀진 타원을 보고 접시위에 놓인 소세지 다섯 개를 떠올렸다.

『후후, 잘 그렸어.』

“이게 다에요!?”

어설픈 아침식사 그림으로 칭찬을 듣고 경악한 승준이 선배를 쳐다보며 말하는 순간, 선배가 승준을 불렀다.

승준아아~

“선배, 왜 불러요?”

『아니, 안 불렀는데?』

선배는 갑작스러운 승준의 질문에 들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승준을 마주본다. 칠판 속의 선배가 한 손에 찻잔을 쥐고 서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승준.

그리고….

『승준아? 먹을 거를 머리 위에 얹고 다니면 못써요.』

교실 밖에서 얼굴을 쏙 내미는 검은 교복의 소녀가 있다.

그 소녀의 모습에 입을 딱 벌리고 돌이 된 승준과 칠판 속에서 찻잔을 떨어트리는 선배. 승준의 머리위에 있는 짜파게티가 팔딱팔딱 뛰면서 비명을 지른다.

『쁘루쁘루! 쁘루! 쁘루삐이이-!!』

『후후후, 승준아.』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고 검은 생머리. 교복이 터질듯이 풍만한 가슴. 그리고 가슴만큼이나 풍만한 허벅지. 승준은 그런 소녀를 보고 육감(肉感)적인 몸매라고 생각했다.

…물론 고기육(肉)이 지나치게 강조된 몸매라는 의미로 말이다.


『프후후, 승준아~ 이리와.』

승준을 향해 손짓하는 선배(?).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살이 물결처럼 파도친다. 출렁, 출렁, 어떻게 걷고 있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그녀의 등 뒤로는 새까만 실 하나가 교실 밖으로 이어져 있다.

“…미, 미끼인가요?”

『미끼네.』

그렇다. 콜레스테롤이 풍부한 미끼라는 소리다.

『…승준아.』

초 고도비만의 자신을 보고 창백하게 질린 칠판 속의 선배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부탁이 있어. 상상해. 저 못된 아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펀치를

“예? 그렇지만 퇴치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면서요?”

『그런 말 한적 없어.』

“파상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상상해.

‘한마디만 더하면 니가 파상당할 줄 알아’라고 말하는 것 같은 날이 선 미소를 짓는 선배의 모습에 찔끔한 승준이 투덜거리며 눈을 감는다. ‘선배지만 진짜 얄밉다. 한 대 때리고 싶다!’ 라고 말이다.

『권투선수의 주먹과 근육이 가득한 팔을 상상해. 펀치의 속도는 전투기 수준이라고 생각하자. 음속으로 반짝! 할 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거야. 크기는 지금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실눈을 뜨고 칠판을 쳐다보는 승준. 그리고 권투선수가 빈 공간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것을 상상한다. 샌드백을 때리는 그 근육, 그 강인함!

『승준아아~이 언니가 안아줄게~』

괴상한 소리를 하며 두 팔을 벌리는 비만선배의 모습을 보며 승준의 오른팔에 불끈 힘이 들어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승준은 오른손을 들고 허리를 크게 꺾는다. 승준의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간절한 소망을 오른손에 담았다. 눈앞에 선배가 있다. 가짜지만, 그래도 선배다.

‘한방 날리고 싶다!’

“우오와아-!!”

승준이 전방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칠판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팔이 그림에서 뻗어 나와 바람을 가른다.

-쿠오오오!

교탁과 책상, 그리고 공기를 까부수며 날아가는 거인의 주먹.

『후후후…승―?!』

-퍼가악!!

살이 뼈 채로 찌그러지는 소음과 함께 주먹에 맞은 선배가 들어온 교실 문으로 날아간다.

-콰창!!

복도의 벽과 까부수며 모란고교의 뒷산으로 날아가는 비만 선배.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그녀의 몸뚱이는 꽃이 만발한 모란고 뒷산의 숲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 우오….”

칠판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팔뚝이 다시 칠판 속으로 쪼그라들며 사라지고 난 뒤, 자신이 벌인 일을 믿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 보는 승준. 흥분을 감추지 못한 그의 입이 귓가에 걸린다.

“서, 선배! 이거 멋져요! 끝내줘요!!”

『승준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선배의 말에 다시 전방을 주시하는 승준. 그리고 끊어진 실을 손에 쥔 채 모습을 드러내는 덩어리망상체의 탐욕스러운 얼굴에 인상을 굳혔다.




“으…응?”

한편 남들이 신나고 재미난 이능력배틀을 하는 동안 혼자 기절한 채 보람찬 시간을 보냈던 은미는 소란 통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안개 낀 듯 뿌연 시선 속에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를 올려보는 은미. 승준은 은미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다가오는 덩어리 망상체에게 주먹을 날렸다.

“우오오오--!!”

은미의 앞에서 호기로운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지르는 레게머리의 소년.

아, 그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꿈이구나.’

그렇게 생각한 은미가 다시 눈을 감고 벽에 몸을 기댔다. 세상에 레게머리라니. 흑인도, 비보이도 아니고 고등학생이 레게머리를 하고 다닐 리가 없잖아.

은미를 감싸고 있던 요란한 소음들이 가라앉고 몇 분 뒤. 슬쩍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던 은미가 몇 번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보고 있는 세상은 어느새 회색 천장으로 바뀌었다.

“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은미가 주변을 둘러봤다.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새하얀 커튼과, 양호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은미에게 익숙한 목소리. 양호실이다.

“-꿈이었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은미를 가리고 있던 커튼이 젖혀지고, 은미를 마중 나온 그녀의 어머니가 은미를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본다.

“은미야. 많이 아프니?”

“아니. 괜찮아.”

“아까 앓는 소리를 내던데.”

은미의 이마를 짚어보고 걱정하는 그녀의 어머니. 미소짓는 은미는 그런 엄마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괜찮아, 엄마. 나 정말 괜찮아졌어.”

링크
네오 아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런 센스쟁이~
중간중간 굵은 글씨가 키 포인트죠? ^^

캐릭터들도 개성있고~ 참신한 재미가 있네요~
중간 삽화도 정겹고~

딱하나 마음에 걸리는건 스파게티와 짜파게티..
스파게티라 했을때는 아~ 미끄덩하고 쭉쭉 뻗는 지렁이 같은 느낌이겠구나 싶었는데
짜파게티가 되니까 꾸부정한 면발이 레게머리보다는 파마머리같은 질감인것 같기도 하고 해서 약간 혼란스럽지만
스파게티나 짜파게티가 어울리긴 하지만, 표현하고 싶은건 짜장면...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드네요 ^^

페이팔 어쩌고 하시는거 보고 외국분인가 했더니 외국분은 이런 표현 힘들지 않나요?
대체 정체가 뭡니까~ ㅎㅎ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만들어 주세요~~

감상평 길게 쓰다가...한번 날려먹으니...다시 쓰기 어려워서 미루다 다시 씁니다 ㅜㅜ

11-04-29 14:35
Sourjelly 아아, 스파게티 짜파게티 부분에 보충설명을 넣었습니다. 스파게티는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정확히 표현했을때 모습이고 짜파게티는 승준의 시점에서 봤을때 승준이 처음 연상한 음식입니다. ㅎㅎ;; 표현하고 싶은건 짜장면...아마 맞을겁니다.
물론 올리브 오일로 잔뜩 샤워한 짜장면이겠죠 <-

외국에서 살고있는건 맞습니다. 미국에 와서 어느덧 6년째 살고 있네요ㅎ.

11-05-0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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