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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창작소설] 서쪽 하늘의 주민들 -2.2- | 글쓴이 | thi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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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2-03-14 16:26 | 조회 | 3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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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결정한 일에 대해 거절할 권리가 나에게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봐도 없다는 결론에 밖에는 도달하지 못하겠다. 내가 그 결정을 거절할 수 있을 만큼 잘난 놈도 아니거니와, 어지간히 귀찮은 일이 아니라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까. 짧게 말해서, 웬만큼 미친 명령이 아니라면 군말 없이 들을 마음이 있다.
하지만 선배의 말을 듣자마자, 미처 말리기도 전에 내 방정치 못한 입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뱉어냈다.
“잠깐만요, 그건 안 됩니다.”
으악!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뒤늦게 손을 들어 입을 막아보았지만 역효과만 났다. 선배의 한쪽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아주 작은 동작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저 동작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둔탱이처럼 행동하는 순간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대충 얼버무리며 하하호호 넘어갔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생각 없이 바로 반박한 건 후회가 되지만, 나중에 죽기 직전까지 맞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
“소아는 아직 그쪽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요. 무턱대고 데려가기에는 안전하지 않다고요.”
“그래서, 단서도 없이 무작정 혼자서 찾으려고? 나도 이 꼬맹이를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보내는 거지. 그 동네에 가서 뭔 짓을 저지를 줄 알고.”
선배는 푸욱 한숨을 흘렸다. 꼬맹이라는 말에 소아가 볼을 부풀렸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마소두래기 한 명이 지금 오늘 내일하고 있어. 바완이나 소호가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도 마립간의 짓이겠지. 그 자리를 메우려면 신입을 뽑아야 되는데 이게 또 골치야.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저기 선배, 한숨을 쉬고 싶은 사람은 저란 말입니다.
다행히도 이 말은 삼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묵직한 스트레스 탓인지 선배는 굉장히 피곤해보였다. 저 상태의 선배를 건드릴 수 있을 만큼의 용기는 아직 나에게 없다. 하긴, 피곤하지 않았더라도 선배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소아가 직접 말한 게 아니라면 웃어넘겼을 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소아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신선했던 것이다. ‘설마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줄이야’ 시리즈 중에 하나랄까. 선배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너희들 마을 입구에서 아주 난장판을 쳐놨더라? 어떻게, 어디 한 번 봉급에서 수리비를 까볼까? 처음으로 장부에 봉급 액수를 빨간색으로 쓸 날이 오겠네.”
“아, 아니 그래도...”
쾅
내가 우물쭈물 입을 열자 선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렇게 강하게 친 것 같지도 않은데 탁자 위에 있던 그릇이나 식기들이 공중으로 펄쩍 널뛰기를 뛰었다. 그리고 나서도 음식이 하나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쓸데없이 토 달지 말고 셋 다 싸그리 잡아와! 그 시한폭탄들이 저쪽 세계에서 사건이라도 일으키면 어쩔 거야?”
으어어어.
해야 할 일은 말하기가 싫을 정도로 간단했다. 폭주한 마립간을 막고 소호와 바원을 데려오는 것.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앞으로 마소두래기를 뽑을 때 ‘타종족 이성에 대한 관심여부’도 채용 조건 중 하나로 고려해 봐야겠다. 아니지, 일단 사건이 마무리 되는대로 바로 안건으로 올리자. 이런 일은 길게 끌수록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할 일은 간단한데 과정이 쉽지 않다. 동족의 기운을 느끼는 소아를 데려가는 게 좋다는 것쯤은 물론 납득하고 있지만,
“그런데 선배, 결국 제 방에서 지내야 하는 건가요?”
이게 문제다. 새벽하늘의 세계에 거처가 있는 사람은 하나린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그리고 이번 일을 받은 내가 그 안에 속해있다. 그곳에서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지내고 있는 나는, 하나린에게 협력해주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조그만 자취방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평소에 깨끗하게 치우며 살고 있고, 도움을 받았을 지언정 집세만큼은 내 돈으로 낸다는 것에 크게 자부심을 느끼지만 갑자기 후회가 된다.
“당연하지. 더 좋은 곳이라도 있어?”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데 그 비좁은 방에서 소아와 같이 지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선배는.
절대로 안 되지! 그 비극을 다시 겪으라고?
소아는 서천에서는 얌전함으로 깔끔하게 포장된 아가씨지만 인간계에 나가면 문자 그대로 재앙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예전에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 한동안 내 방에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돈을 아껴서 간신히 마련한 전자레인지를 폭파시켜버린 전적이 있다.
<퍼어엉!>
<으아아악! 무슨 일이야! 불났어, 불! 불!>
<죄, 죄송해요! 전기를 더 넣으면 훨씬 빨리 되지 않을까 해서!>
난리도 아니었지. 옆집 신고로 소방차에 앰뷸런스까지 왔었다. 사이렌 소리는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들었다. 내가 미쳤어? 또 그 고생을 하라고? 내 스위트 홈을 망치지 말란 말이야!
“그러지 말고 선배 집 좀 빌려주세요. 제가 전용 메이드로서 청소에 빨래까지 다 해놓을게요. 식사도 맡겨만 주시면 다 해놓겠습니다.”
이래봬도 중학생 때부터 내 도시락은 내가 쌌다. 고급스러운 요리야 못하지만 맛있게 만들 자부심 정도는 있다.
좀처럼 누군가를 초대하지는 않지만 선배의 집은 굉장히 넓다. 혼자 쓰면서 70평 정도의 넓이를 자랑한다. 다만 문제라면 살림을 전혀 안한다는 것. 못 한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한 번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가 무덤누리에 몸을 묻을 뻔했다.
선배는 대답 대신 말없이 손가락 관절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고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집을 빌려달라는 데에 화가 난 건지, 전용 메이드가 되겠다는 녀석의 얼굴에 변태 같은 표정이 떠올라서 화가 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머, 그 얘기는 흘려들을 수가 없네요.”
안 그래도 싸했는데 내가 찬물을 끼얹어서 얼어붙기 시작한 분위기에, 솔로 펜타킬 마냥 구원의 손이 등장했다. 문이 없이 주발로 방문을 대신하는 뇌룡족 마립간의 성. 바닥까지 늘어진 촘촘한 주발을 걷어내면서 재희가 걸어 들어왔다. 설마 살면서 재희의 등장을 반가워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망아(忘我) 폭포 근처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걸 명령대로 데려왔습니다.”
“하, 하하하...”
재희의 등 뒤에서 겸연쩍게 웃으며 등에 커다란 배낭을 진 백금발의 초췌한 여성이 등장했다. 라임하트 하제. 하나린의 기술부 책임자. 선배에게 봉래산으로 와야 한다고 연락을 했을 때, 선배는 재희에게 전화를 바꿔달라고 하더니, 재료를 찾겠다며 멋대로 나간 뒤 길을 잃어버린 머저리를 찾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웃지 마. 정나미 떨어진다.”
선배가 으르렁거리자 하제는 비척거리며 탁자에 다가오더니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용히 의자를 당겨 내 옆에 앉으려고 했다.
“거긴 내 자리야.”
막 앉으려고 하는 찰라, 그녀를 옆으로 밀치면서 재희가 자리를 뺏었다. 하제는 잠시 울상을 짓더니 그 큰 베낭을 낑낑 거리며 끌고, 결국 선배의 옆에 가서 앉았다. 곁눈질로 연신 선배의 눈치를 보면서. 힐긋 보니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고 먼지투성이가 된 것이 봉래산에서 길을 잃은 동안 살아남느라 고생 좀 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하제는 여기에 왜 부른 거지? 이유 없이 사람을 관계없는 자리에 부를 선배가 아닌데.
“바원 녀석과 소호가 ‘문’에다가 재밌는 짓을 저질렀더군. 이쪽에서 결계를 열면 감지할 수 있는 술식을 교묘하게 섞어놨어. 마립간이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제가 배낭을 열더니 뭔가를 꺼냈다. ‘이거 만들 재료를 찾느라 길을 잃은 건데...’라며 조용히 툴툴 거렸지만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제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달랑 한 장의 부적. 하지만 그것은 붉은인이 들어간 먹물로 문양이 그려져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종이도 아니었다.
그건 휴대폰에 뜬 그림이었다.
벙찐 우리들을 보고 키득거리며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머리를 쓸 수밖에. 정문으로 나갈 수 없다면 옆에 문을 하나 더 만들면 되지.”
“원리를 조금 설명하자면 일종의 모방 결계 같은 거야. 이 계(界)에 입구가 하나뿐이라면 다른 계를 창조해서 다른 입구를 뚫는 거지. 멀리 돌아가는 방식이라 비효율적이어서 기력 소모가 심할 테지만 소아 정도의 진기가 있다면 신우라도 탈진하지 않고 안전하게 갈 수 있어. 새벽하늘의 세계와 연관이 있는 물건이 필요했는데 딱 알맞는 걸 찾았지. 그림은 조금 있다가 전송해줄게.”
하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 기본적으로 서천의 주민들은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것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라임하트 하제는 다르다.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겉부터 속까지 뜯어고친다. 굴러가지 않으면 모서리를 깎고 돌아가지 않으면 축을 만들며 날아가지 않으면 날개를 단다. 가치관 자체가 서천의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북쪽 하늘 출신이기 때문이겠지.
“다들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재희가 말을 했다.
“나도 가는 거야.”
네?
“핫핫핫, 너 이 유쾌한 녀석. 그런 농담은 하는 게 아니야. 간 떨어질 뻔했네.”
억지로 웃음을 내며 나는 식은땀을 훔치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본 재희의 눈은 고양이처럼 초승달 모양으로 웃고 있었다. 식은땀이 얼어버릴 정도로 몸의 체온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저 눈은 농담이 아니다.
“저도 가도 되죠?”
재희가 선배를 돌아보며 부탁을 가장한 선언을 했다. 선배, 제발 아니라고 해줘요! 하지만, 역시 운명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선배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 입에서 나온 대답은 ‘맘대로 해라’였다. 아아, 피곤하다. 숨쉬는 것도 귀찮아. 푹 숙였던 고개를 드니 선배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휙 옆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보다 오늘은 쉬고 내일 떠나라. 소아, 그래도 되겠지?”
“성에서 머무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만.... 바로 쫓아가지 않으면 놓치는 게 아닌가요?”
“저 녀석 안 그래도 약골인데 몸 상태가 저래서야 가서 잡을 수도 없어. 그리고 한 가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잠깐 뜸을 들였다가 선배는 말했다.
“어차피 서쪽 하늘의 주미들은 T.H. 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서천의 주인이 결계를 쳐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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