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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작소설] 서쪽 하늘의 주민들 -2.1-글쓴이thiol
날짜 12-03-01 07:15조회2834
한 소녀가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녀의 삶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 부족의 미래. 그 부족의 결속을 약속이란 이름하에 강요하는 선조의 유물인 뇌옥(雷玉). 차기 마립간으로써 그 모든 것들을 책임져야만 하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개인의 자유란 화폭 안의 절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으로 볼 수는 있으나 결코 갈 수는 없는 곳. 손으로 쓰다듬을 수는 있으나 손아귀에 쥘 수는 없는 것. 희대의 기린아라는 자부심 저 아래에는 하루하루 늘어가는 부담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소녀는 점차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소년을 만나기까지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서천의 몇 안 되는 강한 인간이자 오랜 시간 동안 커리쉴하프로 살아왔고 슈룹 마을의 지도자 역을 맡았지만 아들에게는 그 짐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있어 불행이란 단어는 그 색을 잃는 듯했다. 비록 인간이라는 한계가 있어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없었지만 그 테두리 안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그를 위해 돌아갔다. 강하고 자애로운 아버지와 상냥하고 따뜻한 어머니. 그런 그들을 존경하고 그 존경을 고스란히 아들에게도 보이는 마을 사람들. 행복이란 것은 어느 때나 그의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소년은 하루하루를 기꺼워하며 지냈다.

  그 소녀를 만나기까지는.

  뇌룡족의 마립간은 그때 폐쇄적인 종족적 특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는 중이었다. 그 시도 중 하나가 바로 인간과 좀 더 개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마찰이 없다고 해서 올바른 공존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싸움이 없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서천의 주인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잘 이해하고 있던 그녀는 오랜 관습을 깨고 인간의 마을에 먼저 사절단을 보냈다. 그리고 그때, 소호(素湖)와 바원은 각자 마을의 대표로써 처음 만났다.

  운명이란 것은 요정의 장난과도 같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둘은 비록 어린 나이였음에도 서로를 처음 보는 순간 좋아하게 되었다.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둘은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소호는 바원을 보며 자유와 개인의 의지에 대해 배웠다. 바원은 소호를 보며 책임감과 높은 사람으로써의 자세에 대해 배웠다. 판이하게 다른 배경을 둔 그들이었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부터 그런 것 따윈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바원의 행동은 과감해졌다. 슈룹 마을의 사절단이 뇌룡 마을에 들를 때, 바원은 성에 틀어박혀 교육을 받는 소호를 억지로 데리고 나와 이곳저곳에 다니며 놀았다. 그런 그들을 잡으러 소호의 경호원들이 뒤쫓아 오면 갖가지 꾀를 동원해 그녀를 빼돌리곤 했다. 그 탓에 점차 바원은 뇌룡족 마립간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비단 소호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종족간의 교제는 금기시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립간은 비록 전대 마립간들에 비해 개방적이긴 했으나 규율과 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참다못한 마립간은 어느 날 슈룹 마을에 직접 들러 바원의 아버지에게 직접 말을 한다. 더 이상 딸의 교육에 방해가 된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교류를 끊어버리겠다고.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써, 아버지는 바원이 뇌룡 마을에 가는 것을 막게 된다. 동시에 졸지에 마을에 불명예를 안기고 만 소호는 차기 마립간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 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났어야 된다.

  바원은 여태까지의 유유자적한 나날을 단칼에 끊어버리듯 어느 날 갑자기 하나린의 결계 파수꾼인 마소두래기 부대에 지원했다. 그는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했고 다섯 차례의 낙방 후에 기어코 붙게 되었다. 타고난 재능은 없었으나 노력으로 극복했다. 몇 년 뒤, 마소두래기 중에서 그는 최강의 권사(拳士)가 되었다. 바원은 많은 일들을 해내었으며 많은 사건을 해결했다. 하나린에서는 물론이고 서천을 통틀어 바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업적을 쌓은 뒤에 바원은 당당하게 뇌룡족의 마립간에게 찾아가 소호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그날, 마립간은 모욕을 당했다며 바원에게 몸소 결투를 신청하고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이 보는 앞에서 철저히 그를 짓밟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현재. 바원은 뇌룡족의 신물(神物)인 뇌옥을 훔쳐 새벽하늘의 세계로 달아났다. 혼자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한들 마립간의 성을 지키는 병사들을 혼자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를 도와준 것은 소호. 그녀의 도움이 있었기에 두 명은 그 어떤 제제도 받지 않고 유유히 뇌옥을 훔칠 수 있었다. 그들을 쫓아 마립간도 새벽하늘의 세계로 간 것이었다. 뇌룡족이 재희와 나를 죽일 생각으로 공격하면서도 번개를 쓰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 것이다.

                                                              ●

  -라는 이야기.

  이거랑 비슷한 시나리오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아침 강의가 없는 날 웬일인지 일찍 일어났을 때, 학교 식당에서 아침 먹으면서 본 드라마랑 비슷하다.

  <이 도둑 고양이년! 어디서 감히 우리 아들을 넘봐!>
  <아악, 어머니!>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반대로 뒤바뀌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재밌어서 라면이 불어버린 것도 모르고 넋 놓고 봤지.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며느리 역을 좀 더 예쁜 사람이 맡았어야하지 않았나 싶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이다.

  확실히 마립간의 성은 그 위용부터가 달랐다. 봉래산 계곡의 절벽 하나를 통째로 파내고 지은 이 성은 천연의 요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 곳을 상대로 공성전을 하려는 마음을 먹을 치는 없을 것이다. 뇌룡 마을에 수도없이 들렀지만 성에 들어와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소아는 말을 마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용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막장 아침 드라마인데, 일을 저지른 쪽의 스케일이 크니 사건의 스케일도 장난이 아니다. 이걸 웃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선배가 베레모를 벗더니 얼굴을 감싸 쥐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답지 않게 눈앞에 차려진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하긴, 대충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전화를 받은 선배는 반응은 짜증의 화신 그 자체였으니까.

  한동안 그 자세로 있던 선배는 몸을 반쯤 의자에 묻더니 식탁에 다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뇌옥을 가지고 도망친 두 녀석도 걱정이지만, 부족의 자존심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할 줄 모르는 부족장이 더 걱정이야. 대체 언제부터 하나린이 집안 치정사건이나 해결하는 곳이 된 거야?”

  소아가 머리를 푹 숙였다. 그러고 보니 항상 궁금하기는 했다. 어째서 소호가 아닌 소아가 차기 마립간으로 지정됐는지 말이다. 그 뒤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참으로 치졸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는 이유로군.

  “신우. 넌 어떻게 생각하냐? 액면 그대로 이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
  “아뇨.”

  주저 없이 선배의 질문에 즉답했다.

  “어느 정도 공감은 갑니다만 이해는 가지 않아요. 앙갚음이 명목이라고 하더라도 뇌옥을 가지고 갔다는 게 굉장히 의심스러운걸요.”

  털어놓고 말하자면 나로서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멀쩡한 같은 종족을 놔두고 왜 다른 종족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비인간끼리의 사랑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궁합이라.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일까? 이종족 사이에는 어떤 ‘벽’이 존재한다. 이 벽은 너무나 두텁고 견고해서 그 어떤 수를 써도 무너트리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그래, 멀리 갈 것도 없이 소호와 바원의 일이 있다.

  용인족의 부족은 수가 굉장히 많지만 서천으로 온 부족은 열 정도다. 그리고 그 열 부족은 고향인 봉래도(蓬萊島)에서, 조상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물(神物)을 가져왔다. 이 신물은 용인족에게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는데, 그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먼 옛날 인간과 교합해 그들 종족을 만든 용이 그들에게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내 생각에는 이게 더 중요하다- 신물에서 힘을 얻기 때문이다. 용인족은 용(龍)이 아닌 용인(龍人)이라 정상적으로 이무기 과정을 밟지 못하기 때문에 여의주가 없다. 설령 이 신물이 파손되기라도 한다면, 뇌룡족 전원이 번개를 다루는 힘을 잃게 된다.

  “차라리 마립간을 쓰러트릴 힘을 탐해서 바원 씨가 소호 씨를 꼬드겼다고 보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겠어요.”

  이게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인 ‘벽’이란 녀석이다. 분명 선천적인 힘은 비인간이 강하지만 욕망에 있어서만큼은 인간을 따라갈 수 없다. 인간은 잘못 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이다. 같은 인간인 나의 눈으로 봐도 더럽게 느껴지는데 비인간의 눈으로는 대체 얼마나 추악하게 느껴질까. 범부의 머리로는 감히 상상 조차 할 수가 없다.

  “아니에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아가 소리쳤다. 돌아보니 소아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바원 오빠가 그럴 리가 없어요. 바원 오빠는 정말로 언니를 사랑한다고요!”
  “그렇다면 어째서 뇌옥을 가져간 거야? 다른 계(界)로 넘어가는 바람에 지금 뇌룡족 전부가 번개를 못 쓰게 되었잖아. 이런 상황에서 마을이 강한 요괴에게 공격이라도 당한다면 큰일이라고.”
  “그, 그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언니를 위해서 그런 게 틀림없어요!”

  소아의 투기 어린 눈빛을 받아내는 것이 싫어 나는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런, 이 말로 미움 받게 될 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내가 바원이라는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알지, 아주 잘 알고말고. 물론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온 소호나 소아 만큼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바원의 다른 모습을 알고 있다. 게다가, 이런 때일수록 내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하는 것이 좋다.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제대로 대비하고 사태를 맞이하는 것과 아무런 준비 없이 의외의 사실과 마주치는 것은 천지차이니까. 어쨌거나 나는 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지시를 내리는 것은 선배의 몫이다.

  “뇌룡족은 ‘혈족의 위치를 탐지하는 능력’이 있지. 소아, 만약 새벽하늘의 세계로 간다면 언니를 찾을 수 있겠어?”

  선배의 날카로운 눈빛에 소아는 움찔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느 장소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곧-”
  “소호 역시 네가 근처에 가면 알 수 있다는 것이겠지. 뭐, 마냥 한쪽에 유리하기만 한 능력 따위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신우.”

  머리를 정리하고 베레모를 다시 눌러쓴 선배의 눈이 이번엔 나에게로 향했다. 느닷없는 호명에 이번에는 내가 몸을 흠칫할 차례였다. 뭔가, 잘은 모르겠지만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소아를 데리고 새벽하늘의 세계로 가라. 당분간 뇌룡 마을의 업무는 내가 볼 테니까.”
  “으엉?”

  선배는 진심으로 날 싫어하는 것 같다.
링크
네오 그러게요 비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그런 특성을 보게 된다면
인간이 생각할때보다 더 추악하게 느껴질것 같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인족이 생긴걸 보면
그 용은 정말...엄~~~~~~청 착하거나 취향이 독특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이 드네요 ㅎㅎ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또 써주세요~

12-03-0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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