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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작소설] 서쪽 하늘의 주민들 -1.3-글쓴이thiol
날짜 12-02-10 23:38조회2336
하늘에서 보는 무덤누리의 안개는 마치 구름 같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두터운 회색 안개 위로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바위산의 꼭대기가 보인다. 뒤집힌 세상에서 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너머의 거대한 그림자가 봉래산이다.

  금오산이 완만하고 넓게 퍼진 형태라면 봉래산은 그 반대다. 거칠고 험하며 불규칙하다. 정상과 중간 즈음에는 그리 좁지 않은 평지가 있어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지만 두 지역이 이어지는 곳은 깎아내리는 듯한 절벽이다. 절벽은 교묘하게 수풀 사이에 숨어있기 때문에 처음 봉래산에 갔을 때에는 발을 헛디뎌 떨어질 뻔한 적이 많았다.

  “저기서 고집부리면서 사는 사람들을 이해를 못하겠다니까.”

  재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귀를 어지럽히는 바람 속에서도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럴 수밖에. 내 뒤에 바짝 붙어 앉아있는데 안 그럴 수가 있나. 작업복 때문에 직접 감촉이 전달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등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부탁이야. 조금만 떨어져줘.

  허리 위로 두른 팔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재희는 더욱 힘을 주었다. 양손을 모두 사용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운의 등에 매달려 있기 바빴으니까. 위에 앉은 두 사람을 고려해서 부드럽게 날고는 있지만 어쨌든 하늘 위를 날고 있다. 절대로 느린 속도는 아니었기에 자운의 풍성한 목 깃털을 단단히 그러쥐어야 했다.

  “고집 같은 게 아냐.”

  등을 압박하는 은근한 압력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기 위해 재희가 꺼낸 화제에 응했다. 제대로 내 말이 들리도록 조금 큰 목소리로.

  “서천 공존 계획의 최전선에 서있는 사람들이 바로 봉래산의 주민들이야. 사무실의 직원들이 서천이라는 하드웨어를 만들고 있다면 봉래산의 주민들은 공존이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는 거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마찰로 푸는 수밖에 없어. 극단적이긴 해도 가장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지. 교육 받을 때 이 말 못 들었어?”

  내가 생각해낸 말이 아니다. 내 머리는 이런 그럴듯한 설명을 만들어낼 정도로 좋지 않다. 선배에게 교육 받으면서 들은 말이다.

  재희도 마찬가지로 선배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 그 깐깐한 성격에 이 얘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 경우에는 자다가도 툭 건들면 말할 수 있게 혹독하게 머리에 각인되었다. 대답 못 할 때마다 냉동고에서 땀띠 날 정도로 얻어맞으면 어지간한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조건반사로 굳을 수밖에 없다.

  인간 사냥꾼이었던 재희가 바보일 가능성은 한없이 영에 수렴한다. 재희의 사건을 제보 받고 그녀의 은신처를 찾아냈을 때, 제일 놀랐던 부분이 바로 그녀가 세운 치밀한 계획이었다. 8평 남짓한 작은 컨테이너는 사냥감의 습성에 대한 자세한 관찰과 사냥 방법이 적힌 종이로 가득 차 있었다. 천정에서 바닥까지 꼼꼼하게 붙여두었던 그 종이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심지어는 사냥감을 잡은 뒤에 먹은 방법들도 낱낱이 적혀있었다. 그걸 조사하다가 설치된 함정 때문에 저민 고기가 될 뻔했던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단 한 번 보고 듣는 것만으로 상대의 특성을 뇌에 각인하는 천부적인 사냥꾼. 그런 머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교육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기억 못하는 이유는, 내 모자란 머리로는 단 한 가지 사실밖에 도출할 수 없다.

  이 녀석은 교육 받은 내용을 외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 말고는.

  그 증거로 선배와 직접 스파링하면서 배우는 격투 실력은 날이 지날수록 늘고 있다.

  “그딴 쓸데없는 거 넣을 공간이 어딨어? 내 기억은 신이 전용이라구.”

  히익! 허리에 두른 팔이 조여 오는 힘이 강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내 귀에 입을 대기까지 했다. 입술로 귓불을 잘근거린다. 보이지 않으니까 더 무섭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귀에다 대고 말을 이었다.

  “모처럼 둘만 오붓하게 있게 됐는데 다른 거 물어볼 건 없어? 아주 개인적인 것도 괜찮은데.”
  [잡담도 좋지만 거의 다 왔어.]

  웅웅거리며 울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뚫고 들려왔다. 자운이었다. 평소보다도 훨씬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인가? 뒤에서 재희가 ‘칫’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착각이겠지. 아마도.

  [편지를 쓴 녀석은 용인족(龍人族)이야. 인간 냄새가 나는 걸로 보니 인간과 친하게 지내는 부족이다. 어느 부족인지는 알겠지?]
  “모르면 하나린 직원이 아니지.”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난다. 잘 하면 일찍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지금 너무 피곤해서 눈 뜨고 제정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남의 연애사업에 관여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얻는 건 쥐뿔도 없이 뼈 빠지게 고생만 했다. 아무리 친구라도 이 정도로 도와주는 게 힘들어서야, 후회만 남는다. 더군다나 내 연애 쪽은 죽어라도 안 풀리고 있으니 분통만 터진다.

  다행히도 도움을 요청한 쪽이 용인족이다. 뒤끝 없고 쾌활한 대신 사건을 좀 과장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종족으로 유명하다. 중대한 사건이라고 해봐야 귀중품이 사라졌다거나 사소한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거나 하는 정도일 것이다. 이번만큼은 매정하기 그지없는 행운이란 녀석도 날 돌아봐주는 건가.

  대부분의 용인족(龍人族)이 인간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호기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최우선 사항으로 여기는 종족이기에 호기심이 시들면 호의 역시 덩달아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 약은 인간들은 용인을 상대할 때 끊임없이 그들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행동을 한다. 인간의 물건에 관심이 많으니까 휴대전화나 게임기 같이 서천에서 좀처럼 볼 수 물건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좋다.

  서천의 주인이 바라는 대로 공존할 수 있을 만큼의 교류를 하는 용인 부족은 서천에서 딱 둘뿐. 뇌룡과 응룡(應龍)이다. 중립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인간의 편의를 많이 봐줄 수밖에 없는 하나린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가까운 부족은 그중에서도 뇌룡이다.

  발 아래로 성큼 다가선 봉래산을 굽어 봤다. 이 정도 높이면 충분히 뛰어 내릴 수 있다. 평소라면 자운이 가까운 곳에 다가가주기까지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재희가 있으니 상관없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서 잠이나 몰아서 자자.

  “도와줘서 고마워.”
  [......마침 여기서 볼 일이 있어서 온 거야. 착각하지 마.]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매번 내가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금오산에 다시 데려다줬다. 성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책임감만큼은 강한 녀석이라 마음에 든다.

  허리를 숙여 자운을 한 번 꼭 안아준 후에 재희의 손을 잡고 뛰어내렸다. 내장이 붕 뜨는 감각에 매스꺼움이 밀려 올라왔다. 삽시간에 커져가는 봉래산의 봉우리를 보면서 착지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재희가 내 멱살을 잡았다.

  “뭐 하는 거야? 밑을 봐, 밑을!”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이런 제길! 알았어!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

  육식동물 특유의 낮고 위협적인 톤. 멱살을 잡았던 양 손으로 이번에는 내 얼굴을 잡아 강제로 자신의 눈과 맞춘다.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맙소사, 이 녀석은 또 왜 화가 난 거야?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이신우. 넌 내꺼야. 함부로 다른 것들한테 몸을 낭비하지 마.”

  순간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흡...!”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짧은 동안, 재희의 혀가 입속을 한껏 유린했다. 제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지르려하는 순간에 우리는 이미 봉래산 정상에 솟은 나무에 닿아있었다. 땅에 난 잡초가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높이에 다다라서야 재희는 입을 떼어내더니 한 손을 뻗어 나무를 붙잡았다. 다른 한 팔은 내 허리에 둘렀다.

  콰가가가가각-

  두꺼운 나무로 깊숙이 파고든 손가락이 다섯 개의 길쭉한 상처를 새긴다. 손가락을 따라 튀어 오르는 나무 파편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터억

  그리고 가볍게 착지.

  나를 놓아준 재희는 자신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이 너무 농염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거칠게 입가를 옷소매로 문질렀다. 이 자식! 선배에게 바치려 했던 내 입술을 가져가 버리다니!

  “무슨 짓이야!”
  “영역표시 몰라? 신이는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아는 게 없구나?”
  “이건 성희롱이야! 자기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세상의 모든 짐승들한테 사과해!”

  입술의 순결을 빼앗겼는데 항의조차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차라리 소한테 미적분을 가르치는 게 훨씬 생산적이겠어. 미안해요 선배. 나란 남자 이제 더럽혀진 남자. 그래도 선배라면 넓은 아량으로 저를 받아주겠죠. 선배는 그런 여자. 물론 내 머릿속에서만.

  가방을 열고 보호결계용 부적 뭉치를 꺼내 양복 안 주머니에 넣었다. 육십 장 정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내 몸 하나는 내가 지킬 수 있다. 가방 안에 고이 모셔 둔 실린더는 세 병. 제발 저건 쓸 일이 없기를 천지신명에게 빌어본다. 다시 한 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내친 김에 헝클어진 머리도 손으로 대충 다듬었다.

  단지 산으로 들어온 것뿐인데 벌써부터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랐다. 햇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산 노목이 잔뜩 있어 언뜻 보기엔 멋있지만 주변에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작은 동물들이 바스락거리며 움직이는 소리. 벌레들이 우는 소리. 산이라면 으레 들릴 법한 자연스러운 소리들이 단 하나도 나지 않고 침묵을 고수한다. 여름임에도 저절로 떨려오는 몸은 비단 산봉우리 정상에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금오산 죽림의 기분 좋은 한기와는 다르다.
 
  위험한 곳에 들어왔다는 긴장감에 넥타이를 맨 목언저리가 불편했다. 그 불편함을 묻어버리기 위해 부러 목구멍 아래에서 꽉 막힌 말을 끄집어냈다. 정신 차려야 한다.

  “가자.”

  일할 시간이다.
 
                                                                                  ●

  지도를 확인하니 목적지까지는 현재 위치에서 내려갔다가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야 했다. 그 아래 협곡에 뇌룡족의 마을이 있다.

  산을 내려가니 대낮인데도 점점 주변이 어두워졌다. 나무는 많아도 침엽수뿐이라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지 않지만 짙은 안개와 이곳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뿜어대는 묘한 귀기에 햇빛이 막히는 것이다. 마치 새벽녘이라도 된 것만 같은, 의지할 빛은 눈앞이 겨우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어둠. 그 사이에서 흐느적거리며 부유하는 혼불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한걸음씩 신중하게 디뎌나갔다.

  언제와도 느끼는 거지만 불쾌한 곳이다. 방금 전에 부정한 재희의 말에 줏대 없이 긍정하고 마는 자신이 굉장히 싫어졌다.

  흑......

  뭐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발을 멈췄다. 흐느낌은 수분이 자욱한 공기를 타고 끊어졌다가 다시 울리기를 반복했다.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흐느끼는 음성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커져갔다.

  “흐흑... 엄마......”

  가늘지만 목소리로 추정컨대 어린아이. 그것도 열 살 전후. 좀 더 다가가자 흐릿하게 윤곽이 보였다. 땅에 주저앉아 양 소매에 얼굴을 묻고 목소리를 죽인 채 울고 있었다. 부르려고 막 입을 벌리는데 재희가 어깨를 꽉 잡았다. 돌아보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 이런 아니구나. 저건 재미있어 보여서 짓는 표정이 아니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지.

  “‘저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무슨 소리야. 아이가 울고 있잖아.”
  “어머나, 신이는 모르겠어? 고작 어린애가 저런 기운을 뿜을 리가 없잖아.”
 
  재희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피식 웃었다.

  “사냥꾼 실격이네. 저 아이. 저렇게 살기를 감추지 못해서는.”
  “...잘못 본 거 아니야?”

  혹시나 못 보고 넘어간 걸까 하고 집중해서 봤지만 역시나 아무 요기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저 아이가 재희의 말대로 둔갑을 한 비인간이라면 주술의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후우, 다행이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싸우는 건 질색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재희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지만 입가에 머문 그 소름끼치는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이 말만을 했다.

  “뭐, 굳이 그러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어.”

  이런 몰인정한 자식. 만약에 저 아이를 미끼로 우리를 잡으려는 존재라면 더더욱 구해내야 한다. 제물을 낚지 못하는 미끼는 그 효용가치를 잃은 셈이니.

  몸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기에 서슴없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 동작만으로도 흠칫 놀라는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이런 말을 감히 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 아이는 불행 중 다행이다. 도와줄 사람이 둘이나 왔으니까. 가까이 가서 보니 빼빼 말라 앙상한 남자 아이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마나 심한 일을 당했는지 옆으로 보이는 얼굴은 하얗다 못해 녹색으로 질려 있었다.

  잠깐, 녹색?

  “꼬마야, 너 괜찮-”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고개를 치켜든 그 아이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아니라 꿈틀거리는 구더기들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쌔애액-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올 때에는 이미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옆으로 빠르게 굴렀고 그 자리를 따라 둔중한 충격과 함께 흙과 돌가루가 튀어 올랐다. 빠르게 자세를 잡고 양손에 부적 한 장씩 꺼내들면서 내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커다란 키틴질의 다리. 조금만 늦게 움직였더라면 저 다리 끝에 붙은 날카로운 발톱에 몸이 꿰여버렸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이란 건 남이 아니라 나한테 써야하는 말이었구나. 젠장.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쯧쯧, 혀를 차면서 재희가 팔짱을 끼더니 나무에 기대어 섰다.

  “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냐?”
  “신이 선에서 할 수 있는 걸 대신 해버리는 건 왠지 재미가 없잖아.”

  상당한 악취미다.

  키득거리며 웃는 재희에게서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서 제법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의 등에서 뻗어 나와 나를 공격한 곤충형의 다리. 그것은 하나에서 끝나지 않았다. 가죽 북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숨겨놓았던 다섯 개의 다리가 등에서 마저 나왔다. 자그만 몸이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무언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울룩불룩 솟아오르더니 사방으로 찢어지면서 곧 본체가 드러났다.

  단단해 보이는 여섯 개의 다리에 걸맞지 않게 몸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워보였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갑각질의 얇고 길쭉한 우윳빛의 몸체. 꿈틀거리며 징그러움을 한껏 과시하는 그 몸의 끝자락에는 세기 싫어질 정도로 많은 작은 눈들이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와 있다. 입이 있어야 할 곳에는 둘둘 말린 대롱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둔갑 같은 품위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이 녀석은 문자 그대로 그 육중한 몸을 아이의 몸에 구겨 넣었던 것이다.

  미끼 길앞잡이.

  오늘 또 하나 새로운 종족에 대해서 배우는군.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하루하루 실천할 수 있다니, 아주 교육적인 동네야. 수업료가 목숨이라는 게 아쉬울 정도다. 불합리적인 서천의 경제관념에 대해 한탄을 하고 있자니 다음 공격이 날아들었다. 크기에 맞지 않게 빠른 속도로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방(埅).”

  시동어를 읊자 부적 하나에 시퍼런 불이 붙더니 몸 주변으로 결계가 전개했다.

  콰득-

  횡으로 휘둘러 오던 다리가 짜부러졌다. 결계가 소멸할 때까지 꾸욱 누르더니 결국 길앞잡이는 뒤로 물러섰다. 쩍쩍 갈라진 키틴질의 외피 사이로 질척한 누런색 체액이 스며 나왔다. 무엇에 공격이 막혔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지 주춤거리며 나를 경계한다. 다 타버린 부적의 재를 손에서 탈탈 털어냈다.

  재희가 말한대로다. 이 꼬맹이, 사냥꾼 자격이 없다. 누가 사냥감이고 누가 사냥꾼이지 역량을 재지 못한다.

  내가 너한테 죽을 줄 알았지?

  “트랩카드다 이 자식아!”

  보호 결계 부적을 구겨서 오른손에 쥐고 달려들었다. 교차하며 휘둘러대는 발을 가볍게 허리를 숙여 피하고 단숨에 아래로 파고든 다음 역겨운 면상에 체중을 실어 어퍼컷을 날렸다.

  뻐억

  순수 질량으로만 따지면 아마도 나의 열 배 가까이 될 길앞잡이의 몸이 결계가 펼쳐지면서 생기는 반동으로 수 미터 가량 공중으로 붕 떴다. 얼마 되지 않는 체공 시간이 끝난 뒤 추락한 길앞잡이는 발바닥에 상당한 진동을 선사했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리를 웅크린 채 늘어져 경련하는 녀석의 머리를 서류가방으로 찍어 완전히 기절시켰다.

  짝짝짝, 박수소리. 어느새 옆으로 온 재희는 입을 동그랗게 말고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근히 가차 없구나?”

  어깨에 올린 손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역시, 싸움은 이기건 지건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조금만 더 가면 무덤누리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이 더러운 기분이 조금이라도 가라앉기를 기대하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링크
네오 트...트랩카드... 왠지 브금 자동재생 되는듯한 착각은...
교육효과인가요? ㅎㅎ

12-02-13 10:22
thiol 네오// 주입식 교육의 범세계적 우수성입니다.
12-02-1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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