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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작소설] 서쪽 하늘의 주민들 -1.2-글쓴이thiol
날짜 12-02-06 15:00조회2305
재희의 집은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사실 집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절이기 때문이다. 법력 높기로 유명한 대승 한 분이 있던 금오사(金烏寺)는 얼마 전부터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선배의 권유로 커리쉴하프가 된 재희는 그 절을 거처로 받게 되었다.

  본인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 온 나도 안심했다. 절 주위로 쳐진 강력한 결계로 인해 절로 들어가는 법을 알고 있지 않는 한 그녀에게 부주의하게 접근할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절에 깃든 법력은 재희의 ‘식욕’을 잠재우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막상 내 왼팔을 잘라 먹어버렸던 상대를 다시 마주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엄청나게 부담되는 일이었다. 절로 내려가는 돌계단에서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피곤해 보이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누구세요?

  -라고 무심코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얌전하니 오히려 두렵기까지 하다. 손수 연밥차를 내오는 재희라니.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다. 줄곧 입고 있던 피로 물든 교복이 아닌 간편한 러닝셔츠와 반바지를 입으니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난 누가 봐도 뻣뻣하게 굳은 동작으로 찻잔을 입가에 댔다. 재희는 그런 내 모습을 미소를 띤 채 곁눈질로 봤다. 고양이 같은 미소다.

  “왜, 누가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컥.”

  소스라치게 놀라 급하게 숨을 들이키다가 입천장을 데었다. 스윽 가까워졌던 얼굴이 멀어지더니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루 밖으로 시원하게 드러난 두 다리를 한가롭게 흔들었다. 악마에 제일 가까운 인간을 골라보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이 녀석을 지목할 생각이다.

  윤재희. 식인귀.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예쁘다기보다는 위험해 보인다. 저 가냘프고 작은 몸에는 자기 몸뚱이만한 도끼를 이쑤시개처럼 휘두를 수 있는 괴력이 숨어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세 자리 수에 육박하는 인간을 잡아먹었다. 자신 역시 인간이면서.

  정신머리 박히지 걸로 유명한 나이지만 아무리 외모가 내 취향이라도 이런 무서운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걱정 마. 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먹을 거니까.”

  이미 먹지 않았나, 내 왼팔. 난 잠자코 차를 마셨다. 여기서 괜히 비위 거슬리는 말을 했다간 내 한 많은 인생을 끊는 계기가 될 뿐이다. 가늘고 길게 살자는 것이 내 신조다.

  잠깐의 침묵을 즐기며 마루 앞의 풍경을 감상했다. 절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금오산(金烏山)의 밑 부분이 몽땅 이 절의 소유다. 결계의 영향으로 일그러진 공간 때문에 산의 반대쪽에 있는 폭포가 절 바로 밑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매번 올 때마다 풍경이 바뀌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질리지 않고 좋았다. 물론 멋대로 절에 접근하려다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에게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위험한 풍경이지만.

  결계로 왜곡된 풍경도 절경이지만 이 절의 명물은 역시 연못에 핀 연꽃이다. 선령(仙靈)이 깃든 연꽃들이 큰 연못을 가득 메워, 사시사철 계절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달착지근한 연밥차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것도 선령 덕분이다.

  찻주전자에서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을 때쯤 난 입을 열었다.

  “일이 들어왔는데 혼자 하기가 힘들어. 봉래산으로 가는 일이라서.”
  “수갑을 풀어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희가 요구했다.

  “안 된다면?”
  “안 도와주는 거지.”

  순식간에 대화가 오고갔다. 재희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오른팔을 흔들어보였다. 은으로 만든 수갑이 짤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잘라낸 사슬이 덜렁거리는 한쪽짜리 수갑. 내 왼팔과 맞바꾼 비싼 녀석이다. 쉽게 풀어줄 마음은 없다.

  “힘도 못 쓰게 하면서 도와달라니, 앞뒤가 안 맞지 않아?”
  “너 정도면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어.”
  “어머, 그런 판단을 누구 마음대로? 그러다가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무슨 수로 보상을 받지?”

  예상했던 반응이다. 나는 침착하게 미리 생각해두었던, 도박과도 같은 대답을 꺼냈다.

  “일단 수갑을 풀지 않고 가자. 수갑을 풀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일이 끝나도 앞으로 수갑을 차지 않는 조건으로.”

  자, 어떠냐. 이 정도 조건이면 너도 할 말이 없겠지? 선배에게 죽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나는 무사하게 다녀올 자신이 있다. 나는 그리 강한 편은 아니지만 쉽게 목숨을 잃을 만큼 호구는 더더욱 아니다. 재희는 능력을 쓰지 않아도 웬만한 도깨비 못지않은 괴력을 낼 수 있다. 근접전만큼은, 칭찬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선배도 인정할 정도로 막강하다.

  엄지손가락을 잘근거리며 잠깐 고민하던 재희는 휴우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이 부탁이니까. 그럼 나도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부탁? 재희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단어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재희는 검지 하나를 폈다.

  “응. 이 부탁은 하나 만큼은 꼭 들어줘야겠어.”
  “좋아. 무슨 부탁인데?”

  말을 내뱉자마자 부주의하기 짝이 없는 입을 저주해야했다. 동시에 내가 뭔가 심하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가를 끌어올려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의 표정은 고기와 피에 굶주린 맹수의 것이었다. 붉은색이 지저분하게 섞인 흑발을 사이로 광기어린 핏빛의 두 눈동자가 보였다.

  얌전하게 굴고 있다고? 택도 없는 소리.

  “신아. 나,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아.”

  재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 녀석, 내색하진 않지만 필사적으로 참고 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날 뜯어먹고 싶은 것을 말이다.

  긴장으로 굳어가는 몸을 달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참으라고 하면 참을 거지? -라는 말은 너무 바보 같겠지?”

  재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발작을 하는 것처럼, 호흡곤란이라도 일으킬 기세로 한참을 웃어대더니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큭큭큭.... 정말 너는 걸작이야. 당연하지. 왜냐하면, 신이는 다 안 된다고 할 거잖아, 안 그래?”

  말을 마치고도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웃음을 삼키던 재희의 모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썩을! 최고로 긴장한 상태였는데도 대책 없이 당했다!

  “...!”

  앞으로 향해있던 내 시야가 기묘한 부유감과 함께 위로 거칠게 꺾였다. 곧이어 등에 둔중한 충격이 오면서 폐에서 공기가 급격하게 밀려나갔다. 흐릿해지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양팔이 붙잡힌 상태였다. 꼴사납게도 마루에 매다 꽂힌 것이다. 앉은 상태에서도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니. 대단한 괴력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눈 깜빡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긴. 어린애도 아니고 내 고집만 부리는 건 안 되겠지. 나 때문에 신이가 곤란해지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그거 영광이네. 그보다 말인데.”

  오랜만에 의식의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용기란 녀석을 건져내 내 위에 올라탄 재희와 눈을 똑바로 맞춘 채로 말했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다. 재희의 러닝셔츠 안쪽으로 훤히 보이는 것을 무시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으니까.

  “내 위에서 내려와 줄래?”
  “자기주장 밖에 할 줄 모르는 애송이한테 주는 벌이야. 내 부탁을 들어줄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던 주제에.”
  “알고는 있었구나.”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해라. 떼를 쓰지 말고.

  팔을 움직이려고 힘을 줬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움직이긴 글렀다. 내 배에 올라타서는 양 다리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아아, 선배가 이렇게 해준다면 기쁠 텐데. 그 이전에 이렇게 아프게 하는 게 비정상이겠지, 아마?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때? 먹지 않아도 돼. 아니, 인심 쓸게. 수갑을 풀어주지 않아도 좋아. 대신, 만약 수갑을 풀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나면,”

  내 얼굴 위로 그림자가 흘러 내렸다. 장막처럼 드리워진 그 안에서 한 쌍의 붉은 빛이 천천히 다가왔다. 숨결이 느껴지는 위치까지 다가온 어둠은 짐승처럼 그르렁 목울대를 울리며 말을 맺었다.

  “넌 내 꺼가 되는 거야.”

                                                                      ●

  재희가 사무실에서 지급한 옷으로 갈아입고 장비를 챙기고 나서 금오산 뒤쪽의 폭포로 향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커다란 스포츠 백을 양 어깨에 끈을 달아 뒤로 맨 모습. 처음 만났던 그 때가 생각나 재생한지 오래인 왼팔이 괜히 아파왔다.

  봉래산으로 걸어갈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직선거리는 썩 멀다고 할 수 없지만, 한 산맥의 높은 두 봉우리인 금오산과 봉래산의 사이에는 날던 새도 이유 없이 떨어져 죽는다는 악명 높은 바위 협곡이 있기 때문이다.

  주야를 불문하고 짙은 안개에 휩싸인 그 협곡은 금오산의 폭포로부터 호수를 지나 연결된다. 이곳에 들어서면 악령들의 속삭임과 이명(耳鳴)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리거나 길을 잃어 죽는다고 한다. 그로인해 협곡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무덤누리.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산의 수만큼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무덤누리를 무사히 걸어서 통과한 사람은 인간과 비인간을 통틀어 서천의 주인 밖에 없다고 한다.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난다. 목이 떨어져 죽을 상황이라도 절대로 무덤누리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가.

  도보로 움직이면 그곳을 돌아서 가야 하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바로 그렇기에 술을 준비한 것이다. 우리는 서천 공존지 활성화 사무실, 하나린의 직원인 커리쉴하프다. 이동에 괜한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다. 그래서 난 예전에 짭짤한 보험을 들어두었다.

  쏴아아아아아-

  땅을 박살낼 기세로 떨어지는 폭포의 소리가 뼛속까지 시원하게 했다. 시퍼런 호수를 강타하면서 드넓은 물가까지 뒤흔든다. 사무실 일이 비는 날에는 혼자서 저 호수에서 멱을 감기도 한다. 여름이니 곧 있으면 많은 인간과 비인간들이 이곳으로 물놀이를 하러 올 것이다. 단, 물 아래에서 다리를 잡아당기는 물귀신이나 요괴 따위를 피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정말로 아무 힘이 없는 인간이 서천에 들어와서 살게 된다면 당장 저 호수의 안전부터 고려해야한다.

  언제나 그렇듯 녀석은 물가의 넓적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글래머러스한 몸매. 거기에 키까지 크다. 단정하고 곱상한 얼굴 위로는 자주색의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었다. 하늘거리는 흰색의 도포 위로는 보라색 띠를 두르고 있다. 두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앉은 모습은 얼핏 인어를 연상케 한다. 물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던 한 쌍의 샛노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가냘프고 몸집이 작은 여자가 내 취향인 건 둘째 치고, 거대한 새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저 얼굴이 예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신우-!”

  대체 왜 만날 때마다 내 이름은 부르는 거야?

  수화(獸化)를 하면서 달려드는 녀석을 항해 재희가 등 뒤로 손을 뻗어 가방 지퍼를 열며 나서려 했지만 막았다. 대신 가방을 열고 기린들에게서 얻어온 술병을 꺼내 보여주었다. 녀석은 돌진하던 몸을 가까스로 멈췄다. 어찌나 돌진력이 강했는지 발을 내디뎌 멈추는 동작 하나만으로 자갈밭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인간이란 것은 참 약은 동물이다. 아, 이는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다. 약다는 것은 곧 생존본능이 강하다는 의미니까. 그것은 칭찬이면 칭찬이지 결코 욕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맥락으로 볼 때에 녀석은,

  “더럽게 약아빠진 놈.”

  나에게 최고의 찬사를 해준 셈이다.

  칭찬을 받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쨌거나 내 목은 안전하게 제자리에 붙어있고 가방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으며 무덤누리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중요하다.

  수화를 거의 마친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 거리던 자운(紫雲)은 인간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전신을 뒤덮고 있던 자색의 깃털이 사라졌고 맹금류 특유의 날카로운 부리가 나오던 얼굴은 여성의 얼굴로 돌아갔다. 눈동자의 노란 귀화(鬼火)가 사그라졌다. 인상은 여전히 찌푸린 채였지만 집채만한 괴물 새가 그러는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같은 존재지만 외관상 몸매 좋은 미녀가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다.

  잊지 않고 술을 가져오길 잘했군. 잘못했으면 새 모이로 전락할 뻔했다.

  자운은 내 손에서 술통을 낚아채가더니 뚜껑을 따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수직으로 통을 들고 단번에 비우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느껴졌지만 참았다. 여기서 ‘조금만 남겨줘!’ 따위의 바보 같은 말을 했다간 다 된 밥에 코가 아니라 토사물을 빠트리는 꼴이 된다.

  더 이상 방울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비운 다음에야 자운은 병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대나무 통은 호수 위로 떨어졌다. 물결을 따라 잠시 흔들리던 빈 술병은 갑자기 물속에서 튀어 나온 비늘 덮인 손에 이끌려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폭포로부터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위로 올려 묶은 자운의 탐스러운 머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에이, 시키다니. 딱딱하게 왜 그래. 자운 씨하고 나 사이에 그런 표현은 좀 섭섭하지 않아? 부탁이라고 부탁.”

  선배에게 배운 대로 친근감을 담아 부드럽게 말했다. 입에 걸린 싱글거리는 미소는 서비스. 마지막에 부탁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에는 한쪽 눈을 찡긋거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역겨워.”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재희의 따가운 살기가 옆얼굴을 찔렀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너처럼 포식자로 군림한 녀석은 모를 테지만 난 지금 대단한 전략으로 다시 한 번 살아남은 게지. 봐라, 얼마나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면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리겠어.

  자운과 나는 악연으로 엮인 사이다. 하나린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일 년이 좀 넘어갈 무렵, 폭포에서 우리 둘은 알몸으로 마주쳤다. 대뜸 죽여 버리겠다며 달려드는 녀석과 사투를 벌였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엄폐물이 많은 숲으로 도망쳐 싸우지 않았다면 난 바로 졌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점을 살려 점잖게 조건을 내걸었다. 폭포 근처를 지날 때마다 죽엽주(酒)를 줄 테니 살려달라고 말이다. 더불어 부탁도 들어주고. 그 대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그 술을 가져오는 것을 잊으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이보게 푸르딩딩한 닭군, 앞으로 내가 여기에 올 때마다 죽순주를 바칠 테니 날 보내주는 게 어떻겠나? 닭군은 똥줄 빠지게 노력해도 그 술을 얻을 방법이 없을 테니 내 부탁도 겸사겸사 들어주고 말이야. 대신 내가 술을 안 가져오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날 쳐 죽여도 좋네.>
  <뭐, 병신아?>

  점잖은 협상 뒤로 더 싸웠지만 자운은 결국 조건을 수락했다. 덕분에 난 봉래산에 여러 번 오갔으면서도 지금까지 온전히 살아있다.

  이런 상대를 부드럽게 대하라니. 처음 선배의 조언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악마가 나를 죽일 계획 제 57번을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보다시피 효과 만점이었기에 처음으로 선배에게 감사했다. 설마 녀석도 잡아먹으려고 했던 놈한테서 좋은 말이 나올 줄은 몰랐겠지.

  “닥쳐! 조건이고 나발이고 죽여 버린다! 본론이나 말해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소리를 지르는 자운의 모습을 보는데, 기묘한 쾌감이 엄습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나보다 강한 자를 마음대로 하는 기분.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편지를 꺼내 빳빳하게 펴서 자운에게 보여주었다. 분명 발신인은 봉래산의 어디쯤 사는 지도 이름도 적지 않았지만 누군지 아는 방법이 있다. 자운은 이무기 사냥꾼이다. 깊은 굴이나 물 아래에서 용이 되기 위해 도를 닦는 이무기들을 냄새로 찾아내 잡아먹는다. 심지어는 아(亞)공간에 숨은 자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런 편지에 묻은 냄새로 발신인을 찾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다.

  역시 보험은 잘 들어두고 볼 일이다.

  난 서비스로 지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자운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는 녀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것 역시 선배에게 전수받은 방법이다. 성공률 99.9%를 장담하던 선배의 얼굴이 기억난다. 난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

  “부탁이야. 나한텐 너 밖에 없어. 이 편지를 쓴 사람에게 데려다 줘.”

  자운의 얼굴이 목까지 새빨갛게 물드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링크
네오 우와 오래만에 올라온 창작소설이 엄청나네요

캐릭터라던지 설정이라던지 정말 매력적인것 같아요~

궂이 단점을 찾으라 한다면 어려운 내용이라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정도겠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들 때문에 재미있게 봤습니다~

만화로 보면 더 좋을것 같네요!

완결까지 잘 달려갔으면 좋겠어요~

12-02-06 17:25
네오 아뇨~ 제가 이런 글을 고쳐야될부분을 지적할정도의 수준은 아니고 ^^
생소한 용어들이 나오니까~
아하~하고 곧 알게 되지만 그런부분에서 말씀드린거고
그것 자체가 또한 매력이라 좋습니다 ^-^

완결때까지 힘내주세요~

12-02-0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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