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인간이란 종은 모든 것을 설정했다.
세상은 설정이다. 모든 것이 설정 ‘되어’ 있는 것이다. 우주, 지구, 인간, 동물, 기계 큰 범주에서부터 분자, 원자, 나노, 쿼크 따위의 작고 미세한 물질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귀신, 하느님, 부처 같은 상상의 공유 링크도 실존하게끔 만들어 버린다.
원두를 갈아서 물에 녹인 것을 커피라고 설정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세분화라는 짓거리한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카페 모카, 카페 라떼, 카페 비엔나… 대체 넣다 넣다 못해 돼지를 넣는 짓거리라니… (30점.) 설탕 커피, 밀크 커피, 커피믹스… 그 중에서도 경도로 동경 124~132도, 위도 북위 43~33도에 북반구 유라시아 대륙 동안에 반도 지형의 이 컨트리, 네이션, 스테이트에서는 가장 대중화한 ‘믹스’라는 것인데, 그 구성요소를 보면 X스턴트 원재료, X엿, 식물X경화유지, 카X인나트륨, 레X틴, X도조절제, 인산X칼륨, 유화X, 유X분말… 등등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설정에 설정을 갈아넣고 물에 녹여넣는다. 말 그대로 ‘믹스’만큼 잘 어울리는 명명이 아닐 수 없는 그것을 섭취한다. 하지만 보통은 이렇게까지 의식하지 않겠지. 이런 것까지 의식할 만큼의 여유는 대게 부리지 않으니까. 아니, 여유라기 보다는 피곤하니까. 그러니까 귀찮으니까… 어느 정도는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여기기도 할테지.
아무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설정화하는데 인류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고, 되도록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는데 힘써왔다. 그 자신의 이름조차 그 부모나 친인척 또는 사이비 점쟁이가 부여한 설정이지만… 지금까지의 내 말투로 설정이란 건 비꼬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로 비칠 수도 있을텐데… 여기서 확실히 말해두는데 나는 설정을 찬양한다. 설정을 찬양하고 명명이란 방점을 찍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 중에 하나다. 이른 바 ‘설정자’. 언젠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설정클럽을 설정해 설정된 사람들을 설정시켜놓고 설정된 규칙과 설정된 분위기로 설정해놓고, 그 설정에 따라 적절히 설정된 행동이나 의식 따위를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이른바 ‘시간을 죽이는 설정자들의 모임’ – 킬링 타임 세틀러 클럽.
영문장이 틀리다느니 맞다느니 교육체계의 설정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사람이 있다면 뫼비우스의 루트를 적극 추천한다.
어쨌든 이러한 설정을 완성시키는 마무리가 바로 명명. 인간이 소통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한 명명체계는 효율의 가속장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 있는 소수가 정하고, 다수가 합의한 설정, 명명의 시스템은 웬만해서는 바뀌는 법이 없다. 인구 밀집의 분포도가 높을수록 그렇다. 그래서 분포도가 높은 곳이 우세한 기준으로 채택된다. 기준에서 벗어난 시점에서 설정, 명명은 방언이 되고 사투리가 된다. 왠지 쓰면 열등한 인종취급으로 이어지는 플래그라고나 할까. 인성교육이 떨어지는 집단일수록 비 문명권으로 은근히 낙인 찍으며 은근히 놀림감의 소재로 설정되곤 한다. 가끔 유머로서의 관용을 지껄이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일수록 자신을 까기보단 남들을 깐다. 보통 방송을 보면 성공한 개그맨들은 하나같이 자기자신을 철저히 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좌파가 아니다. 우익도 아니다. 진보도 공산도 아니다. 굳이 앞에서 이토록 하릴없이 설정을 언급한 까닭은 다름 아닌 내 정체성을 이 자리에서 먼저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나는 창조주다. 착각하지 말길 바란다. 나는 내 자신을 종교적인 범주에 넣기를 거부한다. 나는 나 같은 창조주를 좋아하며 존경한다. 내가 말하는 창조주는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자기가 스토리를 쓰는 영화 감독 등, 통칭 크리에이터라는 직업 부류에 들어가는 작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아닐까라는 나는 주장한다. 감히 라고 성상부사를 붙이는 약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단언할 수 있다. 여기서 특정국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국수주의자가 있다면 면을 좋아하는 국수주의자만 나와 대화가 통하리라 생각한다.(50점) 하긴, 지금의 시대는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단지 내가 존재하는, 내가 존재 함으로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지금의 시대’일 뿐이다.
지금의 시대에 나는 오늘도 학원에 나왔다. 왜 학교가 아닐까라고 태클이 들어온다면… 하고 생각이 드는 건 피해망상이 있어서가 아니다. 절대. 절대. 절대로. 각설이 하고 (15점) 나는 지금의 시대에 반도에 속한, 한 나라에 속한, 한 도시, 한 마을에 설립, 건설, 건축 되어 있는, 부실공사 되어 있지 않길 바라는 ‘그 학원’의 학생이다. 2학년 라’반, 넘버 666번. 노스제로원. 그게 지금의 시대가 부여한 나의 설정이자 이 명명체의 주인이다. 그리고 난 지금 혼란에 빠져있다. 이후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대혼란에…
딱-
이마에 둔탁한 아픔이 느껴짐과 동시에 나는 순간 눈을 깜빡이고 내 동공의 초점은 반셔터 재조정에 들어가 전방의 사물들을 인식했다.
“어이, 남영일~ 또 자냐?”
“와하하!!”
“낄낄낄…”
이 폐쇄공간 안의 누구도 알 수 없다.
분필을 던진 선생도, 내 또래의 나와 같은 복장을 한 20여명의 인간을 포함해…
“보나마나 어젯밤에 미연시나 했겠지~ 아님, 야 애니나 쳐봤든가~.”
“선생님 저거, 오덕이래요.”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완전 씹덕후라고요.” “지난번에 만화캐릭터 팬티 입고 왔더라니까?”
“진짜? 징그러~.”
“우왝, 토 나온다.”
아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자~ 조용조용~ 수업마저 끝내자.”
그래도 나와 같은 년도의 출생자들은 수근거린다.
“저런 놈을 뭐라는 지 알아?”
“뭐라고 하는데?”
“숨덕. 숨어서 덕질하는 놈들…!”
“푸풉…!”
학기초부터 나와 한마디 얘기도 안 나눠보고 그들은 안구스캔만으로도 나를 파악하고 결론을 내렸다. 뭐, 설사 얘길 한들 변하는 건 없겠지만. 나도 그만 어리석게 학기초 어느 등교 날, 학교가방에 전날 산 한정판 피규어를 그대로 들고 와버린 치명적인 우를 범 했긴 했던 것이다.
맹수의 우리에 고깃 조각을 흘린 격. 고기가 더 나오지 않아도 맛을 봐버린 짐승들은 그렇게 더욱 흉폭해진다. 하지만 흉폭해진 짐승을 상대하는 것은 간단하다.
드르륵-
“어? 뭐야? 저 자식… 일어났어?”
“헤에~ 눈빛이 장난이 아닌데?”
“남영일, 뭐냐. 화장실이라면 참아라. 곧 쉬는 시간이니까.”
첫번째, 상대하지 않는 것.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뭐?”
“저거… 뭐라는 거야?”
“남영일, 뭐라고…?”
둘째, 더 큰 고기를 던져준다.
“저는 숨덕이 맞습니다. 그리고…”
순간 정적.
셋째, 그 고기는 썩은 고기다.
“그 뜻은 ‘숨쉬는 덕후’라는 뜻입니다. 그게 제가 부여한 저의 설정입니다.”
술렁이는 교실. 짐승들은 돌발적인 상황에 적응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쇠창살과 우리 안에서 하늘을 본 들 그 너머에 우주와 은하를 인식할 수 있을까… 손으로 쥐어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단지 세치 혀를 놀릴 뿐. 상상력이 결여된 공감대라는 울타리안에서 그들은 나를 감히 설정할 수 없다.
그런 건 허락하지 않는다. 이게 진짜 자존심이란 거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내 곁에 있는 '그것'을 볼 수 없다.
뿔 달린 밀항자, 염색체XX해적, 나체의 여동생인 그녀를…
나체의 여동생인 그녀를…
나체의 여동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을...
…악의권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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