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정신이 들어?”
나리의 말 때문에 조금 겁을 먹었었지만, 날뛰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안심되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 그때, 그녀를 묶은 쇠사슬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등 쪽에 이상하게 공간이 생겨났다. 물러서려했다.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
하지만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미 뻗은 손가락 끝이 잘려나갔다.
누워 있던 선희의 몸이 살짝 떠오르더니 두 다리로 섰다. 투명한 무언가가 그녀를 떠받친 것 같았다.
선희가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귀를 찢는 비명을 질렀다. 음파의 폭풍. 거기 공명하여 등 뒤의 무언가도 진동을 시작했다. 점점 증폭된다. 몸을 묶은 쇠사슬이 부딪힌다. 마찰하며 칠판 긁는 소리 같은 걸 낸다. 귀를 찢는 음량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구역질이 났다.
쌓여 있는 뜀틀이 달그락거리더니 튕겨져나갔다. 유리창이 깨졌다. 선희가 소리 지르고 몸부림칠수록 등 뒤의 무언가도 쇠사슬에서 빠져나가려고 발악을 했다.
그에 따라 그것의 색이 점점 진해진다.
그림자처럼 검으면서도 물처럼 투명했다. 비유하자면 깨어진 선글라스 렌즈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날카로운 칼날이 진동하고 있었다.
잠시 뒤, 선희는 살짝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넣었다.
“여기 창고 안.”
그렇게 말하더니, 등의 쇠사슬 사이사이로 고슴도치 가시 같은 칼날들을 수없이 뿜어냈다. 일순에 주변의 벽들을 갈아버렸다.
쇠사슬을 고정하고 있던 벽들이 사라졌다. 그녀는 자유롭게 되었다.
선희의 머리 위에는 추석날처럼 크고 밝은 보름달이 떠있었다. 너무 커서, 보고 있으면 광기에 빠져 늑대인간이 될 것 같았다.
“맛있는 냄새 나. 어디?”
그녀는 다시 뱀처럼 혀를 날름 거렸다. 걷기 시작했다. 그 방향 끝을 보았다. 운동장에 20명가량의 학생이 묶여 있었다.
그녀는 지금 검은 가죽 안대를 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외부를 인지하고 있는 거지? 냄새? 혀?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는 건가? 그렇다면 최악이다.
차라리 눈이 보이면 좋을 텐데.
그러면 먹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맛있는 냄새 나는 음식으로밖에 인식 못 한다. 망설이지 않고 먹어버릴 것이다.
그녀를 멈추려면 어떡해야 할까.
먼저 내가 누군가를 먹고 힘을 얻어 멈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내가 힘을 얻는 건 불확실하고, 도움을 요청하기엔 시간이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게 내가 힘을 얻어 선희를 멈추는 거다. 하지만 거긴 누군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피를 죽을 때까지 빨지 않는다고 해도,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 비슷한 부하가 되어 자신의 삶을 잃는다고 들었다.
그건 살인과 같거나 그 이상 악독한 짓이다.
그래도... 그냥 놔두면 어차피 저들은 다 죽는다. 그것도 전멸이다. 그러니까 내가 한 명을 희생시키고 나머지를 구한다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무엇보다 내 여동생이 괴로워하는 걸 안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내가 죄를 짓더라도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때다.
쇠사슬이 무거워서 그런지 천천히 걷기만 하는 선희를 추월하여 학생들의 무리로 들어갔다. 어느 여학생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살려 달라 애원했다.
미안,
어쩔 수 없어.
나도 괴롭다고.
이러고 싶지 않다고.
날 원망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만든 다른 놈들을 원망해준다면 고마울 거야.
정말 미안해.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갔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피부를 뚫고 들어간다.
그 순간, 벽돌이 날아와 내 머리를 때렸다.
“오빠란 녀석은 여고생 들고 하악 하악. 여동생은 겨울날 담요 대신 쇠사슬 몸에 감고 어기적어기적. 친구란 애는 학교건물에 올라가 그걸 보며 헤벨렐레~. 이게 웬 아닌 달밤에 개판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땅에 떨어진 벽돌을 다시 집어, 내 머리를 때리는 것은 강시인 시나였다.
“당신, 눈이 붉어졌네요. 피가 필요합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쿨하게 자신의 대검으로 손목을 그었다. 나에게 내밀었다.
“강시의 피는 기운이 차가워서 뱀파이어의 몸에 잘 맞지요. 림피드님도 급할 때 드십니다. --- 그러면서 둘이서 밤마다 알몸으로 웃흥하게...”
그녀는 급히 칼을 칼집에 넣어버렸다.
갈증이 심해 죽을 것 같았던 나는 급히 그 피를 마셨다.
마치 청량제 같았다. 몸에 싸아하게 퍼졌다. 박하사탕을 먹었을 때의 느낌이 났다. 그와 함께 몸에 힘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시나가 나에게 작은 칼을 넘겨주었다.
“일반인들을 묶은 줄을 풀어주세요. 선희는 제가 데려가죠.”
“하지만, 선희는 지금...”
“보면 압니다. 이 일 하루 이틀 한 게 아니니까요.”
시나는 선희를 바라보았다. 달렸다. 마치 땅에 발을 박아 넣어 잡아당기는 듯한 발진력.
선희의 몸이 검은 그림자에 둘러싸였다. 시나를 향해 검은 창이 뻗어 나왔다.
시나는 몸을 땅바닥에 붙이듯 낮췄다. 피했다.
땅에 거의 엎드린 자세. 거기서 굽혔던 다리의 힘을 폭발시켰다. 몸이 석궁처럼 발사된다.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초저공 비행상태로 대검을 뽑았다. 그대로 벤다.
-키잉!
날카로운 금속음을 울렸다. 선희를 덮은 검은 물질에 검이 튕겨나갔다.
시나는 손이 저린 듯 인상을 찡그렸다.
검은 칼날은 쉴 틈을 주지 않고 솟아나왔다. 시나는 다급히 물러섰다. 뺨과 팔을 베였다. 살짝 베인 것이지만 진동하는 칼날인지라 상처가 컸다.
피가 멈추지 않는다.
검은 칼날은 계속 공격해왔다.
흐르는 피를 닦을 틈을 주지 않는다.
시나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있는 힘껏 기합을 내질렀다. 칼날이 몸을 뚫는 걸 무시한 채 주먹으로 땅을 때렸다.
그 지점을 중심으로 파문을 형성하여 모래알이 튀어오르는가 싶더니, 나와 주변 사람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state break - 상황 파괴.
모든 걸 혼란 상태로 만들어 이점을 잡는다.
선희도 예외가 아니다. 눈가리개를 한 그녀는 공중에서 방향 감각을 잃었을 것이다.
그 공중의 1초간. 시나는 높이 점프했다.
선희 머리 위.
등 뒤엔 빛나는 만월.
검에서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닮은 얼음 기둥을 뽑아냈다. 위에서 내리찍었다.
선희는 그 얼음 한가운데로 칼날을 관통시켜 갈랐다.
시나는 그걸 기다렸다. 칼날을 스치듯 피했다. 미끄러져 내려왔다. 선희에게 검을 후렸다.
방금 막 칼날을 길게 내뻗은 참이라,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물질은 얇아져 있었다.
시나가 그 일격을 때리고, 반동으로 날아올랐다.
선희가 고통에 찬 기침을 했다.
충격이 방어를 뚫고 들어갔다.
시나에게 내 여동생을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진짜 시체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뭐라 할 수 없었다.
“선진씨. 사람들 이제 다 풀어주었나요? 빨리요!”
그녀가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지탱하며 소리쳤다.
그제야 난 급히 사람들을 묶은 줄을 끊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사람들을 다 풀어주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학교건물에서 수많은 나리가 댐에서 물이 넘치듯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의 시나는 선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니 힘든 것이겠지. 게다가 그녀도 흡혈귀면서 나에게 피를 나누어준 참이다.
저 많은 나리가 방해까지 한다면 뭐가 어찌 될지 모른다.
학교건물 위층을 보았다. 나도 뱀파이어인지라 적외선 쌍안경을 낀 듯 잘 보였다. 몇 명의 나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모두 나와서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에도 가능성이 있다.
루시의 ‘장기말’이라는 표현, 체육창고에서 한 명의 나리가 중심이 되고 주변은 가만히 있었던 점, 그리고 과연 여자애들이 많아져 봤자 시나같은 강적과 싸우려 들을까? 보통 뿔뿔이 흩어져 도망칠 텐데 그러지 않는다는 점.
100%라고는 못 하지만, 저 무리를 지휘하는 ‘본체’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계속 분열할 수 있는 적을 나 혼자서 막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지휘하는 녀석이 있다면 그 녀석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난 나리의 무리와 맞부딪히지 않게 약간 우회해서 학교 건물로 향했다.
새로운 몸은 바람처럼 빨라 순식간에 도착했다.
‘본체’는 아마도 체육창고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그 녀석일 것이다.
따라서 선희의 모습을 하고 있고, 뱀파이어의 피 냄새가 날 것이다.
일단 예민해진 후각에 의존하여 피 냄새를 따라갔다.
3층의 4번째 교실. 피 냄새의 근원은 그곳이었다.
문을 열려고 손을 내뻗는 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어서 와. 내 옆에 앉아. 여기가 제일 전망이 좋아.”
열고 들어갔다. 거긴 2명의 선희가 있었다.
정확히는 선희 모습의 나리. 눈에 요사스런 기운이 감돌고, 입에 음란한 미소가 걸쳐진 점이 진짜 내 동생과는 달랐다. 마치 요마같았다.
그보다, 변신한 녀석이 왜 2명씩이나 있는 거지? 이유가 신경쓰였다.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는 건 왼쪽이다. 이쪽을 잡아야 할까?
“사람들은 풀어주었어. 그리고 선희는 시나씨가 구해줄 거야. 다치기 전에 그만둬.”
“다치기 전이라니. 운동장에 나가 있는 ‘나’들은 이미 죽어나가고 있는데? 게다가 난 다치는 걸 싫어하지 않아. 왜냐면 그래야 강해지거든.”
나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섬광과 함께 충격폭풍이 휘몰아쳤다. 난 뒤로 날아가 버렸다.
함께 날아간 교실 책상들. 그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폭발 불기둥이 도미노처럼 뒤로 밀리며 솟구치고 있었다.
폭발은 멈출 줄 몰랐다.
땅울림으로 건물이 무너지려 했다. 충격파가 몸을 울렸다. 구토가 날 것 같다. 무엇보다 폭발음 때문에 고막이 찢어지려 했다. 귀를 틀어막아도 아프다.
“하핫. 난 무한히 늘어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시체를 폭발시킬 수도 있다고! 아무도 날 못 이겨!”
나리는 그렇게 광기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도망치려했다.
잡아야 한다. 왼쪽? 오른쪽?
일단 피 냄새가 나는 왼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왼쪽은 날 비웃는 듯이 달려와 나를 붙들었다.
그럼 오른쪽이었다는 건가? 어째서?
바보같이 그 이유를 답이 나오고서야 깨달았다. 나리는 자신을 여동생이라 하고 싶어했다. 그럼 본체가 계속 내 옆에서 선희인 척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즉, 본체는 내 앞에서 변한 쪽이 아닌 그전부터 계속 선희 모양이었던 쪽이었던 것이다.
나리 본체는 이미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중에서 멈추었다.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했다.
“흡혈귀의 안개….”
나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교실 안이 희미한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뱀파이어는 늑대, 박쥐, 안개등으로 변할 수 있다고 들었다. 림피드가 온 것이다.
나리가 뭔가에 다리를 잡혀 교실 안으로 끌려들어 간다. 하지만 그녀는 창틀을 잡고 버텼다.
“놔! 놓지 않으면, 학생들 대신 집에 보냈던, 내 분신들을 다 폭발시켜버릴 거야!”
그 말에 림피드는 실체를 드러냈다. 손엔 아직 나리의 다리를 잡은 채다.
“어때? 너흰 내 말을 거역 못 해. 난 숫자도 능력도 무한하니까. 여기에 있는 내 분신만 다 폭발해도 너흰 콩가루야!”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얼굴은 공포에 질린 채였다. 림피드가 한걸음 다가가 입을 그녀 귓가에 갖다댔다.
“날, 우습게 보지 마.”
그녀의 목을 지그시 깨물었다.
-Undeaded hometown in My heart.-
-(내 마음속의 아직 죽지 않은 불사의 고향.)-
한순간, 주변 모든 공간이 화염에 휩싸였다. 바닥의 먼지부터 어두운 밤의 만월까지 차별 없이 불타올랐다.
타오른 후 화상이 아물듯 새로운 시공이 생겨났다.
그건 본 적 없는 이국의 옛 영토였다.
패배자의 피처럼 붉은 하늘.
불에 범해지는 푸르렀던 대지.
그 불에 능욕당할 대로 당해서 그 몸이 허물어져 가는 잿더미 중세의 성들.
전쟁의 광야(狂野)에 나는 서 있었다.
전쟁? 아니, 전쟁은 이미 끝나있었다.
여긴 패배한 땅. 적에게 유린당해 태어난 지옥이었다.
모든 게 죽어서 미래가 없는 공포의 장소였다.
무서워져 림피드를 찾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황금빛 화염을 드레스처럼 차려입은 어린 여신님이 있었다.
머리엔 권능을 뜻하는 극렬의 왕관.
몸엔 소녀의 몸을 반투명하게 보듬는 불새의 날개옷.
발엔 해를 녹여 만든 허공을 디디는 화염 구두.
그 모습엔 이 공간에 군림하는 지배자의 위엄이 있었다.
일전에 시나에게서 들은 적 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왕좌에 앉게 된 여왕님이었다고.
그것이 운명이 틀어진 계기.
그녀의 나라는 매우 작았다. 그런데 새로운 왕도 우습게도 어린 여자애니, 주변 나라들이 깔보고 쳐들어왔다고 했다.
그들의 대의명분은 ‘부모를 저주해 죽이고, 왕좌에 앉은 마녀를 벌한다.’였다.
그들은 방금 막 부모를 잃어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잡아 죽일 때, 이유를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사방에서 쳐들어온 적들에게 붙잡혀 화형에 처해졌다.
살 속의 수분이 끓어올라 터지고, 몸이 누린내를 피우고, 손톱이 검게 타 바스러지는 가운데, 그녀는 말했으리라.
“너희가 그리 말한다면, 그리되어주마. 진짜 마녀가 되어 다 죽여주마!”
몽환의 확신.
우매의 신념.
망각의 현실.
그것이 마법.
마음이 현실을 뛰어넘어 진실조차 재구축한다.
슬픔. 부모를 잃은 아이의 슬픔.
아픔. 가장 가슴을 아리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아픔.
그것은 적의 피에 대한 배고픔.
그날 그 땅은 지도에서 소멸했다.
마치 고대의 대륙 아틀란티스가 사라진 것처럼.
그리고 한 마리의 뱀파이어만이 세상에 남았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영지를 심장(heart) 속에 담아두고, 영원히 유랑하는 흡혈귀.
그게 그녀였다.
이미 이 세계의 신이 되어버린 그녀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이 잔혹한 현실에 끌려들어온, 각지에 있던 나리의 분신들은 모두 불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자랑하는 분열능력도 폭발 능력도 다 소용없었다. 일순에 끝이었다.
결국, 이 땅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어린 여왕 림피드 블랜은 쓸쓸히 피의 노을을 배경 삼아 눈을 감았다.
어느새,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눈앞에는 피를 빨린 나리가,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져 움찔대고 있었다.
"싫어. 싫다고. 왜 힘을 얻었는데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건데!“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일어섰다. 옆에 뒹굴고 있던 책상의 다리부분을 잡았다. 아직도 반항할 생각인가?
그녀는 책상에서 다리부분을 잡아 뜯어 내더니 뾰족한 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뽑고 찌르고 뽑고 찌르고 자해를 계속한다. 난 놀라서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놔! 그리고 날 보지 마.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냐고. 내가 그렇게 더럽냐고!! 물론 알고 있어. 더럽다는 거. 하지만, 오빠에게 있어서 난...”
“림피드! 어떻게 좀 해봐!”
그에 림피드는 나리의 등에 무언가 카드같은 것을 붙였다. 그러자 나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상처가 심해서 걱정되었지만, 보니까 그녀의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 있었다.
그녀를 등에 짊어지고 밖으로 향했다.
선희가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되었다.
학교 현관에서 나와, 운동장을 보았다. 그곳의 모습은 좀 전에 내가 있었던 때와 크게 변해있었다. 학교의 나무들은 폭발 탓에 검게 타서 부러져 있었고, 운동장을 둘러싼 철조망도 걸레상태였다. 거기에 반해 운동장 곳곳은 북극에서 빙산이라도 잘라온 듯, 집체만한 얼음덩이들이 곳곳에 굴러다녔다.
급히 시나를 찾았다.
시나는 몸 곳곳에 베인 상처와 인간에게 물어뜯긴 자국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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