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안녕?
3화.
“오빠. 일어났어?”
눈을 떠보니, 나리가 가느다란 쇠사슬을 잡고 있었다.
그 끝은 내 목에 연결되어 있었다. 개목걸이가 채워진 것이다.
주변이 어둡다. 전깃줄에 매달린 주황색 백열등만이 이곳에 빛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부분 그림자 져서 형체가 불분명하지만, 배구공, 뜀틀, 허들, 매트 등, 학교 체육교재들이 어질러져 있는 게 보였다. 벽의 위쪽엔 이 교재들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철장이 쳐진 작은 창문이 있었다.
확실하다. 여긴 어느 학교의 체육창고였다.
내 앞의 나리는 뜀틀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말 타듯 앉아있고, 주변에 또 다른 수많은 나리는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는 체육교재들 사이, 또는 위에서 날 구경하고 있었다.
질 나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앞쪽의 나리가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앉아있던 몸이 기울어지며, 본의 아니게 개처럼 기어 그녀 앞까지 끌려갔다.
치욕에 이를 가는 나를 보고, 나리는 감미롭다는 듯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녀는 신발을 벗었다. 맨발의 새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오빠. 내 발을 햛아줘. 부드럽게. 난 발이 민감해서 거칠게 하면 뭐랄까…. 부담스럽달까, 버틸 수 없게 돼버려. 대신 발가락을 달콤하게 깨무는 건 용서해줄게.”
그녀는 요염하게 뭔가 기대하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그딴 짓을 해야 하지?”
“오빠는 내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잖아?”
“...무슨 말이야.”
나리는 ‘에휴’하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눈치를 못 챈 거야? 아까 전부터 ‘오빠’라고 부르며 힌트도 주었는데.”
그야 이상하단 생각은 했지만….
아니, 그보다 진짜 날 오빠라 부를 녀석의 일이 중요하다.
“너, 선희는 어쨌어.”
“선희?”
나리는 갑자기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웃긴 오빠.’라며 웃어댔다. 그리곤 손을 권총 모양으로 만든 다음, 자살하듯 자신의 머리에 갖다댔다. 이어서 방아쇠 당기는 시늉. 고개가 약간 꺾였다.
동공이 작아지며 망령 같은 표정이 되었다.
거긴 분명 원망이란 감정이 서려 있었다.
“선희는 여기 있어요. 오빠.”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의미를 모르겠다. 나리는 자신을 내 여동생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가? 진심으로?
“설마 아직도 못 알아보는 거야? 좀 쇼크.”
그녀는 슬픈 얼굴을 하더니 검지로 자신의 ‘목과 가슴이 이어지는 부분.’을 찔렀다.
손가락이 살을 헤집고 들어간다. 수술할 때처럼 몇 방울의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아래로 쫙 내려 배를 갈라버렸다.
놀라서 숨이 턱 막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뒤,
따뜻하고 작은 손이 내 뺨을 어루만지는 걸 느꼈다.
눈을 떠서 앞을 봤다.
선희였다.
“짜잔. 어때?”
알몸인 그녀는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이 빈 나리의 시체는 붉은 가스가 되더니 선희를 감쌌다.
그것은 곧 평소에 선희가 즐겨 입는 옷이 되었다.
“알겠어? 오빠가 찾는 그런 애는 존재하지 않아. 오빠는 계속 나랑 같이 살아왔던 거야.”
...말도 안 된다. 그런 거.
“그럼 최나리는 누구인데? 가족이 있고 신분증명이 되니까, 학교도 다니고 알바도 한 거 아니야?”
“최 나리는 실제론 존재하지 않아. 어렸을 때 오빠랑 헤어진 선희가 다른 집에서 최나리로 살게 된거야.”
“무슨 소리야. 난 엄마에게 ‘동생은 아버지쪽으로 갔다.’라고 들었어.”
“음... 그건 오빠가 날 걱정할까봐 거짓말한 거 아닐까?”
“말도 안돼는 소리 그만해!”
“말도 안돼는 소리 아니야!”
“그럼 내가 아는 선희는 없다고?”
“그래. 없어!”
“......”
“.......”
믿을 수 없지만, 그걸로 어제 선희의 이상한 행동들이 설명된다. 호텔에서의 일이라던가, 붕대 녀석(실은 나리)에게 협력한 일 등등.
하지만,
“...전화.”
“응?”
“그 전화받았던 선희가 진짜 선희인 거지? 네가 잡아놓고 있었던 거잖아.”
“에이. 그것도 내가 오빠 놀리려고 한 장난인데? 봐봐. 난 계속 늘어날 수 있고, 모습도 바꿀 수 있어. 그 정도는 간단하지.”
그녀의 말대로 주변엔 똑같이 생긴 나리들이 기괴한 ‘육체의 꽃밭’을 이루고 있다. 이 꽃은 누구로라도 변해서 사람들을 속일 수 있겠지.
그러나, 난 아직 선희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선희가 있다는 걸 증명해내지 못하면, 그녀를 ‘없었던 것’으로 해버릴지도 모른다.
“너. 내 여동생이라 하고 싶은 거지?”
“이제야 알아주는 거야?”
“하지만, 그럼 이상해. 이제까지 완전히 내 여동생으로 있었는데, 인제 와서 정체를 밝히고, 다시 여동생이라 주장할 이유가 없어. 선희는 아직 있고, 그걸로 넌 뭔가 꾸미고 있었어. 그치?”
그녀는 처음에 부정하려고 하다가 생각나는 변명거리가 없는지 말을 멈추었다.
“내가 왜 그러려 했다고 생각해?”
“글쎄?”
그 말에 그녀는 억누를 수 없는 증오를 비웃음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듯, 입술 끝을 일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떨었다.
“오빠도 어느 정도 화가 나면 참지만, 너무 화가 나면 소리지르든지, 어딘가 쓰든지, 싸우든지 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지? 이성적으로 그게 손해 보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감성적으로 어쩔 수 없잖아. 나도 그 애가 미워서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둔감 멍청한 로리콘 오빠가 이 기분을 알아주길 원했으니까 이런 짓을 꾸민 거야.”
“의외로 쉽게 선희가 있다는 걸 밝히네?”
“흥. 원래 속일 생각도 없었어. 오히려 속지 않는 게 좋아. 그래야 지금까지 준비해온 게 헛수고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의 뒤쪽. 체육교재들의 산을 발로 차서 무너뜨렸다. 그 언덕 너머로 날 끌고 갔다.
선희가 쓰러져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약한 어린애의 몸을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쇠사슬로 몇 겹이나 묶어놓았다. 눈도 검은 가죽 안대를 가려놓았다.
옛날 노예들에게도 저렇게까진 안 했을 것이다.
피가 머리끝까지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이야! 너 죽여버린다!”
“말을 너무 심하게 하네. 이 애 한번 도망쳤었다고? 오빠가 없었으면 다시 잡지도 못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어쩔 수 없다니, 선희가 서커스단의 맹수라도 된다는 거야?”
“사실 맹수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것도 아주 굶주린 맹수. 몸이 괴물의 것으로 변하고서 아직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근데말이야. 오빠. 부탁이 있는데...”
“뭐야?”
“아까부터 저 애를 자꾸 선희라 부르는데... 아니라고 했지? 병원에서 헤어질 때도 말했어. 저 애 이름은 ‘선희’가 아니라 ‘선영’이라고. 잘 기억해두라고. 그런데 왜 내 이름을 자꾸 저 애에게 넘겨주는 거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고!!! 선희는 나야!!!!!!!!!!!!!”
“.......”
“후우. 조금 흥분했네. 그런 그렇고 자아. 오빠. 여기서 문제야.”
갑자기 또 변해서 매우 즐거워하는 얼굴.
“이 창고밖에는 내가 납치한 학교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 애들 집에는 가짜인 내가 가 있으니 경찰이 올 일은 없습니다. 이때, 굶주린 선영이가 깨어납니다. 아직 약기운이 있는데다, 너무나 배고픈 그녀는 살기 위해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먹을 겁니다. 냠냠냠.
어느 정도 배가 차면 정신이 들겠죠. 그럼 먹다 남은 인골과 내장, 피바다 속에서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을 거에요. 분명 이전의 자신으론 돌아가지 못하겠죠. 완전히 식인귀가 되거나, 폐인 될 것입니다. 둘 다 흥미로운 상태입니다만 오빠는 그걸 보기 싫겠죠?”
“당연하잖아!”
내 여동생이 사람고기에 중독된 모습이나 삶을 모두 포기한 모습 따윈 보고 싶지 않다.
“그럼 오빠. 방법은 하나야. 그 애를 죽여.”
“뭐?”
“오빠가 직접 죽여서 편하게 해줘. 그 방법밖에 없어.”
그녀는 내게 여동생의 살해를 강요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저 녀석은...
“역시 그냥은 못 하겠나 보네. 그래서 준비한 게 있지.”
나리는 주머니에서 붉은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이건 뱀파이어의 피야. 림피드가 술 마실 때 일부러 술병을 깬 적 있거든. 그 유리조각에 묻은 피를 내 피에 섞어서 감염량을 늘렸어. 자기 피를 짜내는 건 좀 아팠지만 꿈을 위해 힘냈어! 오빠가 저 애의 체액을 빨아먹고 불로불사가 되면 나랑 둘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테니까.”
주변의 나리들이 나의 몸을 억눌렀다.
눈앞, 선희의 모습을 한 나리가 유리병에 든 붉은 액체를 자신의 입에 흘려 넣었다.
내 위에 올라탔다. 방긋 웃었다. 목덜미를 물었다.
피가 흘러나와 나리의 입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있던 뱀파이어의 피가 내 안으로 주입되는 게 느껴졌다. 그 피는 뜨거웠다. 방금까지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혈관을 통하여 몸 안에 퍼지자, 온몸의 세포가 다 녹아내리고 다시 구축되는 걸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리는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며, 상처 부위를 에로틱하게 핥는다. 그런 자신을 즐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가늘게 떨며 숨을 내쉬었다. 마치 살짝 성감을 느낀 듯이.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빛이 모자란 폐쇄적인 눈으로.
“그럼 나중에 봐. 오빠.”
선희의 모습을 한 나리와 그 외 수많은 나리는 체육창고에서 우르르 몰려나갔다. 창고의 철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난 기어가서 어서 열라고 주먹으로 두드렸다.
“아 참. 오빠. 뱀파이어의 힘은 첫 흡혈을 해야지만 활성화된대. 안 그러면 단순히 아픈 사람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까 말이야. 선영이를 안 먹으면 거기서 영원히 못 나온다는 거야.”
역시 그녀는 즐거워하는 목소리였다.
아는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잡아먹으라고 할 수 있지? 그녀의 힘 같은 것보다, 마음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내 생각에 진짜 선희와 가짜 선희(나리)가 뒤바뀐 것은 내가 부모에게 끌려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을 때다. 그때 나리는 선희에게 가서 오빠가 사고당했으니 어서 와보라고 했겠지. 마음 뭔가 터지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울면서 따라갔을 것이다. 나리는 그런 그녀를 평소의 ‘좋은 언니.’인 척하며 위로했을지도 모른다. 선희는 그녀를 믿고 있었으므로 고마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병원의 인적없는 어느 구석.
왜 여기 왔냐고 물으려는 찰나, ‘좋은 언니’는 자신을 믿고 있던 동생이 소리지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기절시키려 한다. 선희의 시야 한쪽에는 자신을 대신할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인다.
그렇게 그녀는 알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납치된다. 끌려간 뒤엔 몸이 이상해져 가는 걸 느끼며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고프고 춥고 아프면서, 자신이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되어가는 데 떨었을 것이다.
이런 짓 악마밖에 못 한다.
나리는 악마다.
“야! 그 애는 널 믿고 있었어! 나도 널 좋은 녀석이라 믿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오빠는….”
“내가 뭘.”
“나도 믿고 있었어. 그때, 날 지켜줄 거라 생각했는데 배신했고, 나중에 데리러 온다고 했으면서 편지 한 통 없었어. 내
가 새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도 없고! 믿었는데…. 아아. 그래. 잘 됐네. 오빠도 이제 내 기분을 알겠네. 난 그래서 기뻐!”
-쾅!
나리는 철문을 발로 차고 달려가 버렸다.
“야! 무슨 소리야!”
그녀를 불러보았지만, 벌써 떠난듯했다.
나리는 선희에게 들은 것인지, 나와 선희의 과거를 상당 부분 아는 것 같다. 나와 같이 살던 선희가 부유한 아버지 쪽 집에 가서 살게 된 것과 내가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한 것 말이다.
어떻게 알고 있지? 선희에게 들었나?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몸이 휘청거렸다. 현기증이 일었다.
계속 피가 끓어오르더니 결국 말라서 혈관에 눌어붙은 것 같았다.
이 진득하고 불쾌한 감각을 녹여 없애 줄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머릿속에서 순결한 처녀의 목을 물어뜯는 자신의 이미지가 자꾸 떠올랐다.
참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걸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방법을 생각해 내기 전, 이미 선희가 눈을 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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